브로드웨이를 이끄는 여성 캐릭터들 19. 아니타

알다여성 주인공뮤지컬

브로드웨이를 이끄는 여성 캐릭터들 19. 아니타

이응

일러스트레이션: 솜솜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West Side Story)> 

초연 1957년, Winter Garden Theatre
대본 Arthur Laurents
작곡 Leonard Bernstein
작사 Stephen Sondheim
안무/연출 Jerome Robbins
무대디자인 Oliver Smith
수상 1958년 토니상 무대 디자인상, 안무상

영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중 '아메리카'를 부르는 아니타(가운데 연보라색)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흔히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이 작품이 초연된 지도 벌써 60년이나 흘렀다. 60년 전에도 미국의 십대들은 오늘날 한국의 십대들 못지 않게 발랄한 일상을 보낸 듯 하다. 세익스피어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제는 ‘사랑이 증오를 이긴다’ 라고 할 수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른들의 증오의 제물이 된 어린 연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조금 다르다. 여기에 나오는 어른들은 아이들이 서로 사랑하고 친하게 지내기를 간절하게 바란다. 오히려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십대 갱단들이다. 라이벌 갱단에 속한 두 주인공의 사랑은 정말 증오를 이겼을까? 그걸 알려면 아니타를 보아야만 한다. 뮤지컬의 주인공은 아니지만 이 글의 주인공인 아니타. 동명의 영화에서도 아니타는 인상적이다. 어떤 배우가 이 역할을 맡든, 어떻게 해석하든 아니타는 아니타의 길을 간다. 바로 주인공인 토니를 파멸로 이끄는 길이다.

사실 이 작품은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아니라 <이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될 예정이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현대적인 뮤지컬로 만들고 싶었던 연출가이자 안무가였던 제롬 로빈슨은 현재 뉴욕 시청 근처의 로워 이스트 사이드를 배경으로 카톨릭 젯트파와 유태인 에머랄드파를 붙여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현재 뉴욕 링컨센터 자리에 위치한 슬럼가에서 푸에트로리코 출신과 폴란드 출신의 십대 갱들이 맞붙어 사상자를 내는 일이 벌어지면서 이야기의 방향은 서쪽을 향했다.

줄거리

주인공인 마리아는 푸에르토리코 이민자다. 자신보다 먼저 뉴욕에 온 오빠의 집에 온 지 이제 한 달이다. 마리아를 실질적으로 돌봐주는 사람은 오빠인 베르나르도의 여자친구인 아니타. 옷가게에서 일하고 수선도 할 줄 알아서 직접 마리아의 드레스를 디자인하고 만들어줄 정도의 능력자다. 십대 갱단인 샤크파와 젯트파 때문에 골치가 아픈 경찰은 두 갱단을 불러 댄스파티를 열고 이 자리에 전직 젯트파의 주축이었던 토니가 현 두목의 요청으로 참가한다. 이 파티에서 마리아와 토니는 한눈에 사랑에 빠져 키스를 하지만 바로 제지를 당하고 패싸움의 원인이 될 뻔 한 뒤, 마리아는 오빠에 의해 귀가당한다. 

둘의 사랑이 젯트파와 샤크파의 감정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고 결국 패싸움이 일어나자 토니는 마리아에게 이 싸움을 꼭 말리겠노라 약속하고 싸움터로 간다. 싸움을 말리던 중 리프가 베르나르도의 칼에 찔려 죽자, 토니는 홧김에 베르나르도를 찌른 뒤 마리아를 외쳐보지만 이미 쏟아진 물. 경찰은 두 사람이 죽고 한 사람이 도망친 사건을 뒤쫒고, 샤크파는 두목인 베르나르도의 원수를 갚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데, 마리아는 애인을 잃은 아니타를 토니에게 보내 함께 도망칠 계획을 알려달라고 설득한다. 

아니타는 마리아에게 토니를 잊으라고 설득하지만, 토니는 전혀 설득당하지 않는다. 토니가 있는 곳으로 달려 간 아니타를 그곳에 있던 젯트파가 강간하려 들자, 분노가 치민 아니타는 샤크파의 치노가 마리아를 쏴죽였다고 쏘아붙이고 뛰어나온다. 마리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토니는 숨어있던 식당 지하에서 뛰어나와 온 거리를 뛰어다니며 치노를 부르다 자신을 찾아오던 마리아와 마주치지만, 그 순간 치노의 총이 불을 꿈고 토니는 마리아의 품에서 숨을 거둔다.

아니타

보통 영화나 뮤지컬 속에서 갱의 애인은 육감적인 몸매에 머리는 텅 빈 인물로 그려지거나, 머리가 있다면 그 머리를 써서 갱의 눈을 피해 다른 남자와 사랑을 나누는 인물로 그려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아니타는 1957년에 개막한 뮤지컬 속에서조차 일반적인 갱의 연인과는 다르다. 

아니타는 노래 ‘아메리카’를 이끌며 샤크파의 두목인 베르나르도를 거침없이 비웃고 놀리고 농담을 던진다. 또한 베르나르도의 갱단 전체를 백수로 지칭하며 오히려 일하는 토니가 낫다고 말한다. 토니는 전직 젯트파의 실력자였지만 건달 생활을 청산하고 동네 식당을 운영하는 닥의 밑에서 웨이터로 일하며 건전한 인생, 즉 자신이 쓸 돈을 자신이 버는 인생을 살아보려고 하는 인물이다. 아니타 역시 옷가게로 아침 저녁 출퇴근을 하는 번듯한 직업인이다. 

일러스트레이션 솜솜

아니타는 베르나르도의 동생 마리아를 자기 동생처럼 보살핀다. 마리아가 미국에서 처음 참가하는 댄스 파티에 들뜰까봐 어린아이처럼 하얀 색의 옷을 만들어 주라는 베르나르도의 주문과 가슴이 좀 더 잘 보이게 파달라는 마리아의 주문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주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베르나르도를 죽인 당사자인 토니를 마리아를 위해 용서한다. 

처음에는 마리아에게 토니를 잊으라는 지극히 이성적이고 당연하고 분노에 찬 충고를 하지만, 토니가 베르나르도를 고의로 죽인 것이 아니라는 마리아의 설득에 넘어가 준다. 자신은 사랑을 잃었지만 마리아마저 사랑을 잃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이 장면은 뒤에 나오는 토니가 식당주인 닥을 설득하지 못하는 장면과 미묘하게 대비된다. 마리아는 베르나르도의 애인 아니타에 토니가 그를 일부러 죽인 게 아니라는 사실을 설득하는데 성공하지만, 정작 토니는 닥에게 고의로 죽인 게 아니라는 사실을 설득하는 데 실패한다. 닥은 그토록 토니를 아꼈지만, 토니의 살인이 사고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본을 쓴 아서 로렌츠는 여성은 감정적이고 남성은 이성적이라는 성차별적인 측면에서 이런 대비를 표현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비극 앞에서 여성의 공감대와 동지애가 복수심을 이기는 모습을 보여준다. 닥은 그가 보아온 젯트파와 샤크파의 증오의 나날들을 기반으로 토니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고 마리아의 죽음을 입 밖에 내는 실수를 하고 만다. 즉 토니를 죽음에 이르게 한 건 아니타 혼자만이 아니다. 실제 방아쇠를 당긴 치노를 비롯해 토니를 숨겨줬던 닥도 이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

너희 피에 침을 뱉겠어

아니타는 토니를 찾으러 조심스레 닥의 식당에 도착하지만 거기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토니를 지키겠다고 모여든 젯트파 일당이다. 그들은 베르나르도의 애인인 아니타를 알아보고 그들이 아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아니타를 욕하고 희롱하고 심지어 강간하려고까지 든다. 아니타는 인종과 성별과 몸매와 직업과 악센트에 얽힌 모든 욕을 참으며 토니를 만나려고 하지만, 결국 자신의 몸에 손을 대자 분노가 터진다. 

그들은 아니타의 애인이 바로 몇 시간 전에 죽었다는 것을 눈꼽만큼도 배려해 주지 않는 몰상식한 모습을 보인다. 아니타는 "베르나르도 말이 옳았어. 너희들 중 누구라도 죽으면 나는 그 피 위에 침을 뱉겠어!" 하고 외치며 그들의 몰인간성 앞에서 증오와 복수심 가득한 말을 던진다. 마리아가 곧 여기로 와서 토니를 만날 거라는 사실 대신, 마리아가 토니와의 관계를 알게 된 치노의 총에 맞아 죽었다고 말해버린 것이다. 

아니타의 말 한 마디에 젯트파 건달들도 얼음이 된다. 아니타의 역할은 여기까지다. 다음 장면은 토니가 어두운 길거리로 뛰어나와 마리아의 눈 앞에서 치노의 총에 맞아 마지막으로 ‘Somewhere' 를 부르다 세상을 떠나고, 마리아가 샤크와 제트 모두에게 총을 겨누며 모두가 살인자라고 통렬하게 외치는 것이다. 사실 이 작품이 정말로 <로미오와 줄리엣>이 되려면 여기서 치노의 총을 받아든 마리아가 스스로를 쏴죽였어야 했겠지만, 마리아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간신히 살아남는다.

복수가 곧 삶이야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에는 세 개의 강렬한 댄스신이 있다. 안무가이자 발레리노이자 연출가인 제롬 로빈슨의 야심 덕분이다. 특히나 두 갱단이 패싸움을 붙는 장면은 발레 <스파르타쿠스>의 전투장면에 비견되며, 현재까지도 다른 뮤지컬의 유명한 싸움 장면에도 어김없이 비슷한 안무가 등장하는 안무의 교과서다. 덕분에 이 작품에서는 학교도 중퇴한 십대 갱단들이 발레를 기반으로 한 정교한 안무와 라틴 살사를 재해석한 발레를 추는 모습을 여한없이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세 댄스 장면 중 가운데 노래 ‘아메리카’를 이끄는 사람이 바로 아니타다. 아니타는 마치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속의 유다처럼 파멸적인 거짓말을 뱉으면서도 미움 받지 않는 인물이기도 하다. 아니타는 여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에 어리고 순진하다는 공식에서 멀찌감치 벗어날 수 있었고, 그래서 오히려 생생하면서도 역동적인 캐릭터가 됐다. 아이러니컬 하면서도 다행스럽다. 

사랑에 깊이 빠지면
옳고 그른 건 중요하지 않아.
사랑이 곧 삶이야!

이렇게 마리아와 노래했던 아니타는 복수를 완성함으로서 삶을 사랑 앞에 두고, 사랑에 눈 먼 마리아는 그 사랑을 잃는다. 누가 이 뮤지컬을 두고 증오를 이긴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증오조차도 치기로 가득 차 있는 이 무대 위에는 삶과 사랑과 미움이 풀리지 않는 매듭으로 얽혀있고, 그래서 아직까지도 사랑받는다. 삶, 사랑, 미움, 뭐 하나 빠지지 않는 게 아마도 현실이기 때문에. (여담으로 이 작품은 1957 당시 개막한 작품 가운데 작곡가, 연출가, 배우를 비롯한 동성애자가 가장 많이 참여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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