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여성을 위한 케이팝은 없다: 2018, 여성과 케이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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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여성을 위한 케이팝은 없다: 2018, 여성과 케이팝

황효진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더 나은 여성의 삶을 위한 콘텐츠 플랫폼 <헤이메이트>가 <핀치>에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2018년을 결산하는 다섯 편의 글을 연재합니다. <헤이메이트>의 윤이나, 황효진이라는 필터를 거쳐 올해의 엔터테인먼트 지형을 돌아봅니다. 세번째 순서는 올해의 케이팝과 여성.

 

걸 그룹과 관련한 이야기를 사람들 앞에서 할 기회가 두 해에 걸쳐 두 번 있었다. 2017년에는 이른바 '소녀' 콘셉트가 걸 그룹들에 끼친 영향과 여성 혐오적 사회 안에서 걸 그룹이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 중점적으로 분석했다. 그리고 2018년이 됐을 때, 걸 그룹에 대해 한 번 더 이야기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졌는데 사실상 2017년과 달라진 게 없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둘러싼 여성 혐오는 나아지지 않았고, Mnet에서는 <프로듀스 101> 세 번째 시즌인 <프로듀스 48>이 방송됐으며, 심각한 문제로 지적됐던 소녀 콘셉트는 이제 한물간 트렌드가 됐나 싶었지만 변형된 교복을 무대의상으로 삼은 팀들은 지치지도 않고 계속 등장했다. 

무언가 달라졌다고 믿고 싶다면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까? 그나마 소녀 콘셉트나 청순한 이미지가 아닌, 다른 노선을 선택한 걸 그룹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LATATA'로 데뷔한 (여자)아이들은 요 근래 나타난 신인 중 이례적으로 접근 가능성을 높인 콘셉트를 따르지 않았고, 레드벨벳은 '피카부'나 '배드보이'를 통해 무대에서 웃지 않고 굳이 애교를 부리지도 않는, 무심한 여성의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메시지? 이미지. 

이런 움직임을 증거로 지난 1년 동안 케이팝이 조금은 나아갔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걸 그룹을 만드는 쪽에서도 여성 팬의 존재를 좀 더 강하게 의식하기 시작했으며, 애교나 주체성 없는 소녀 콘셉트로는 주요 소비자인 여성들을 끌어들이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없다. 걸 그룹, 더 나아가 케이팝이 만드는 메시지나 콘셉트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는 않나? 그보다 더 즉각적으로 보는 이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부분이 있는 건 아닐까? 이것은 나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2018년의 강연이 끝난 후, 그 자리에 참석한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들려준 이야기는 걸 그룹에 대해 말하는 내내 내가 아주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부분을 간과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해주었다. 초등학교 저학년이든 고학년이든 여자아이들에게 걸 그룹은 가장 큰 동경의 대상이며, 그 이유는 외모, 특히 몸매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처럼 되고 싶어서 다이어트에 신경을 쓰고, 신체검사에서 몸무게가 많이 나오면 울기도 한다고, 그런 어린이들에게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선생님들은 말했다. 케이팝의 콘셉트가 던지는 메시지의 힘을 결코 무시할 수는 없지만, 눈으로 보이는 이미지의 힘은 그보다 더 크다. 아이돌은 누군가 가진 재능과 외모를 젊은 시기에 압축해 최대한으로 발휘하는 직업이며, 그중에서도 걸 그룹은 다이어트와 메이크업을 포함한 꾸밈 노동의 최전선에 있는 존재다. 소위 말하는 '외모 코르셋'을 조일 수밖에 없으며 사실은 그것으로 버티는 직업인 것이다.

걸 그룹,
지금 한국 여성의
사회적 위치

블랙핑크의 제니는 어떻게 '인간 구찌'라는 별명을 얻을 수 있었을까? 트와이스가 데뷔 초반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같은 표현으로 알려진 건 매우 이상한 일 아닌가? 에이핑크의 손나은이 유명해진 게 트레이닝 팬츠를 입고 드러난 라인 때문이라는 것은? 인스타그램에서 '둘러보기'를 몇 분만 해봐도 걸 그룹의 다이어트 비포 애프터 사진을 올리며 다이어트 의지를 불태우는 계정을 수두룩하게 발견할 수 있다. 어느 날에는 포털 사이트에서 올리브 <밥블레스유> 클립 영상을 보다가 마마무가 등장하는 다이어트약 광고와 마주하기도 했다. 걸 그룹은 외모와 몸매의 다양성을 유난히 찾아보기 어려운 직업군이고, 그런 경향은 걸 그룹의 콘셉트가 서서히 변화하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여기까지 생각하다 문득 몇 가지 의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꾸밈 노동과 다이어트 압박에 시달리는 것은 걸 그룹뿐만이 아니라 한국 여성 전체의 문제 아닐까? 아랫세대에게 외모 코르셋에 대한 강박을 심어주는 원인이 오로지 걸 그룹뿐이라고 말해도 될까? 앞의 질문을 긍정하고 뒤의 질문을 부정한다면 결국 걸 그룹은 외모 자본을 파는 최전선에 위치해 있으며, 지금 이 사회에서 여성이 어떤 위치인지, 여성들에게 무엇이 요구되는지 아주 뚜렷하게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직업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겪은 일,
우리가 겪은 일

요컨대 걸 그룹이 겪는 문제는 분명 케이팝이라는 특수한 산업 안에 있지만, 다른 한국 여성들의 삶과 떨어뜨린 채 해석할 수 없다. 외모 코르셋뿐 아니라 다른 부분에서도 마찬가지다. 올해 걸 그룹 멤버들이 겪은 사건들은 한국 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일들과 매우 밀접하게 붙어 있었다. 레드벨벳의 아이린은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고 밝혔다는 이유만으로 일부 남성 팬들의 공격을 당해야 했고, 에이핑크의 손나은은 'girls can do anything'이라는 문구가 쓰인 핸드폰 케이스가 찍힌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는 이유만으로 또 공격 당했다. 문장으로 쓰면서도 믿기지 않는 이 상황의 당황스러움과는 별개로, 걸 그룹 멤버가 자신의 목소리를 조금이라도 드러낼 때 그들에게는 엄청나게 위협적인 수준의 폭력이 쏟아진다. 미쓰에이 출신의 수지는 여성을 불법 촬영한 스튜디오를 처벌하는 데 힘을 보태달라는 청와대 청원을 캡처해 인스타 스토리에 게재했다가 공격당했고, 카라 출신의 구하라는 최종범이라는 남성의 불법 촬영과 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여성으로서 목소리를 내고 공격 당하는 것, 남성에 의한 불법 촬영이나 폭력 모두 지금 한국 여성들이 겪고 있는 문제고, 걸 그룹 멤버들은 대중 앞에 드러난 가장 만만한 여성들로서 공격을 당할 수 있는 위치에 너무 쉽게 놓인다.

죽기엔 너무나 큰

지금 시대에 어떤 한 산업이 여성혐오를 기반으로 움직인다면, 그래서 그 안에 있는 여성들의 삶을 또 다른 여성혐오에 취약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면 그 산업은 지속되기보단 사라져야 마땅하다. 처음에 이 글의 가제를 '케이팝 머스트 다이'로 잡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케이팝은 '다이'하기에는 이미 너무나 큰 산업이다. 전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으며, 종사자들의 수는 어마어마하다. 방탄소년단의 경우에서 확인할 수 있듯 성공할 확률이 낮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성공했을 때는 말도 안될 정도로 큰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판이다. 여러 콘텐츠의 원천인 스타, 심지어 전 세계에 존재하는 미래의 소비자들에게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틴 스타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아이돌이란 엔터테인먼트 내에서도 매력적인 산업일 수밖에 없다. 

<프로듀스 101> 메인 타이틀. 사진제공 Mnet

아이돌 지망생을 대상으로 한 오디션 프로그램이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YG엔터테인먼트는 JTBC <믹스나인>을 처참히 실패하고도 <YG 보석함>을 또 다시 만들었고, Mnet은 <프로듀스 101> 시즌 4를 논의 중이라고 밝혔다. 오디션 프로그램은 아랫세대의 꿈을 볼모 삼아 재능과 젊음을 착취하는 윗세대의 기만에 가까운데다 남녀 아이돌 지망생 누구에게나 불합리한 시스템이지만, 우리가 숱하게 봐 왔듯 여성일 경우 외모를 포함해 전방위에 걸쳐 더욱 혹독한 평가와 촘촘한 압박을 견뎌내야 한다.

이분법을 넘어서는
질문이 필요해

나는 걸 그룹의 모습에서 나, 그리고 또 다른 여성들의 얼굴을 본다. 외모 코르셋에서 자유로워지기는 쉽지 않다. 야망을 가져도 여성혐오적인 사회 구조 안에서는 성공에 앞서 생존하기조차 어렵다. 성취는 논란에 가려 쉽게 간과된다. 구조가 그렇다면, 어떻게든 성공해서 그 구조를 무시할 수 있는 높은 위치까지 올라가는 게 더 빠르지 않겠냐고 생각할 때도 있다. 그러나 한 여성의 성공이 여성혐오로부터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지는 못하듯, 몇몇 걸 그룹이 성공한다고 해서 케이팝이 여성 혐오와 무관해지는 것도 아니다. 기울어진 운동장 안에서 이미 남성들이 만들어놓은 방식으로 성공하는 것이 진짜 성취인지 역시 고민해봐야 한다. 

'탈덕'이냐 아니냐, 걸 그룹을 소비해야 하냐 말아야 하냐 같은 손쉬운 이분법보다 지금 필요한 건 걸 그룹과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여성으로서, 또 케이팝의 수용자로서 우리가 해야 할 질문들을 발굴해내는 일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케이팝의 여성혐오적인 부분을 모른 척 하지는 않았는지, 걸 그룹이 제시하는 여성상의 진보가 현실과 정말로 연결되어 있는지, 춤과 노래와 무대를 사랑하는 여성이 여성혐오적인 구조를 벗어나서도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고 그에 따른 성취를 인정받을 수 있는 환경은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 이러한 질문들을 던져보는 것에서부터 케이팝도, 우리도 달라질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4. 나의 미스터 션샤인 아저씨: 2018 드라마와 여성>이 12/10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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