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드웨이를 이끄는 여성 캐릭터들 22. 산드라 윌킨슨

알다여성 주인공뮤지컬

브로드웨이를 이끄는 여성 캐릭터들 22. 산드라 윌킨슨

이응

일러스트레이션: 솜솜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초연 Victoria Palace Theatre, 2005, West End, London
대본 Lee Hall
작사 Lee Hall
작곡 Elton John
원작 영화 <Billy Elliot>
연출 Stephen Daldry
안무 Peter Darling
수상 2006년 올리비에 어워즈 작품상, 남우주연상, 안무상, 사운드 디자인상, 관객인기상
2009년 토니 어워즈 작품상, 대본상, 남우주연상, 남우조연상, 연출상, 안무상, 오케스트레이션상,
무대디자인상, 조명상, 사운드 디자인상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는 동명의 영화를 무대 뮤지컬로 옮긴 작품이다. 빌리라는 이름의 11살짜리 소년이 주인공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어린이 뮤지컬이 아니다. 오히려 지독하리만치 어른들 세계의 민낯을 보여준다. 그런데도 빌리가 아름다운 것은 그 혹독한 세계에서 11살짜리가 꿈을 한 번 품자 그 꿈을 향해 직선으로 날아갔기 때문이다. 

영화의 시니리오를 쓰고 연출을 했던 창작팀이 그대로 합류했고 영국의 국민 가수인 엘튼 존이 곡을 썼다. 오리지널 창작진이 그대로 포진한 덕분에 이 작품은 뮤지컬로 각색되는 과정에서 생기기 마련인 정치색 지우기나 원작에서 멀리 떨어진 결말을 피했다. 영화 속 그 이야기와 감동을 그대로 담은 채 무대 뮤지컬의 문법으로 재탄생했다.

<빌리 엘리어트>의 줄거리를 새삼 읊을 필요는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요식행위로 정리해 보자면, 영국의 대처 수상의 탄광 폐쇄에 격렬하게 반대하던 더함 지방의 광부들이 1984년부터 1년이 넘도록 격렬하게 파업을 하던 시기를 배경으로 권투 수업에 좀 일찍 도착했던 빌리가 우연히 여자 아이들을 위한 발레 수업에 끼면서 발레를 가르치는 윌킨슨 선생님의 눈에 띄게 되고, 춤에 대한 자신의 열망을 깨달아 런던의 로얄발레 스쿨에 입학하기까지의 우여곡절이다.

여기서 윌킨슨은 무료하고 가난한 탄광마을에서 유일하게 빌리의 꿈을 알아보는 어른이다. 이 작품에서 빌리를 움직이게 하는 원인이고, 지지자이며, 발판이자 더 넓은 세계를 보여주는 사람이다. 시골의 작은 탄광마을의 체육관에서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수업은 두 가지다. 여자는 발레, 남자는 권투. 이 영원히 마주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세계의 경계에 엉거주춤 빌리가 선다. 영화 속 빌리는 영화의 시작부터 T Rext 의 ‘Cosmic Dancer’에 맞춰 좁은 방 안에서 신나게 춤을 추는 모습으로 등장하지만, 뮤지컬 속 빌리의 춤에 대한 열망은 치매인 할머니의 기억을 통해 소환된다. 주정뱅이 바람둥이었지만 춤 하나는 기가 막히게 추었던 할아버지에 대한 할머니의 회상이 담배연기를 가득 머금고 열린 창문들 밖으로 사라지면, 그 자리에는 할머니 앞에서 스텝을 밟는 빌리가 있다. 이 장면은 영화에는 없는 무대만을 위한 장면으로, 영화와 무대 뮤지컬의 다른 표현방식을 드러내주는 교과서 같은 장면이기도 하다. 

결코 어머니가 아닌 인생의 지지자

그리고 빌리는 슬며시 발레의 세계를 엿본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아버지로부터 빌리에게 유전된 춤의 열망이 빌리를 권투가 아닌 발레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빌리는 투덜거림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윌킨슨 선생의 발레 수업에 끼어들고, 윌킨슨은 그런 빌리를 내치지 않고 받아들인다. 여학생들의 "남자애가 발레를 하다니!" 하는 조롱을 차단하는 것도 윌킨슨 선생이다. 차갑고 직선적인 말투의 윌킨슨이지만 빌리가 춤을 추고 싶어 한다는 사실은 알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마치 5페니의 푼돈을 위해서인 듯 말하면서도, 윌킨슨은 빌리에게 흥미를 느낀다. 

마침내 빌리가 발레를 좋아할 뿐만 아니라 재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때달았을 때조차 윌킨슨은 빌리에 대한 태도는 냉정함을 유지한다. 탄광 마을에서 아이가 꿈을 지녔을 때의 한계를 알기 때문이다. 로열 발레 스쿨 시험을 보자고 말할 때조차도 윌킨슨은 마치 핫도그라도 사먹으러 가자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다. 

이 냉정함이 무너지는 순간은 빌리가 엄마의 편지를 들고 왔을 때다. 빌리가 성인이 되었을 때 읽어 보라던 편지다. 윌킨슨이 편지를 받고 소리 내어 읽기 시작하자 빌리가 다른 한 쪽에서 그 편지를 조그맣게 따라 읊는다. 빌리의 머릿속에는 세상을 떠난 엄마가 남긴 글자들이 하나하나 각인처럼 새겨져 있다. 윌킨슨이 읽어주는 편지는 빌리에게는 마치 엄마가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어른 여자의 목소리이기 때문이고 자신을 돌봐주는 유일한 성인이기 때문이다. 

일러스트레이션 솜솜

하지만 윌킨슨은 이 장면에서 울지 않는다. 빌리도 울지 않는다. 그 둘은 끝까지 담담하게 이 장면을 넘기지만 관객들은 운다. 이 장면을 마주칠 때마다 여기서 울지 않는 윌킨슨에게 감사한다. 작품에 등장하는 빌리의 아버지와 형을 포함한 모든 어른들이 파업 때문에 정신을 놓고 있을 때 윌킨슨은 빌리의 인생에 관심을 가지는 유일한 인물이다. 마치 세상을 떠난 엄마의 빈 자리를 메울 것 같지만 윌킨슨은 결코 엄마의 자리를 대신할 생각이 없다. 지독한 남성성으로 가득찬 탄광 마을에서 윌킨슨은 마치 여성의 몸을 입은 남성인 듯 행동하지만, 그는 그곳에서 유일하게 열린 인물이자 빌리에게 다른 세상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윌킨슨은 '여성성'을 상징할 생각이 없다. 비록 빌리가 윌킨슨에게 엄마의 따스함의 일부나마 느꼈다 해도, 윌킨슨은 빌리가 한 발 다가설 때 한 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인다. 그 둘의 포옹은 두 사람이 헤어질 때 처음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윌킨슨은 마치 영화 <시네마 천국>의 알프레도가 토토에게 그랬듯이 빌리에게 이 마을로 돌아오지 말라고, 결코 돌아보지 말라고, 자신에게 배운 것은 다 잊고 그곳의 선생님에게 모두 새로 배우라고 충고한다. 윌킨슨은 엄마가 아니라 선생으로 남기를 원한다. 덕분에 작품은 빌리가 엄마 없는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신파라는 옷을 걸치지 않는다.

이름 모를 그 사람

윌킨슨 개인의 인생에 대한 단서는 많지 않다. 딸인 데비의 당돌한 모습에서 윌킨슨의 성격의 일면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데비는 빌리에게 반해 무작정 들이대면서도 빌리가 자신에게 고백하는 형식을 취하길 바란다. 아직 어리지만 데비는 여자는 남자에게 고백을 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고루한 어른들의 사고방식에 젖어 있다. 그러면서도 고백을 받기까지 무작정 수줍게 기다릴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는 아이다. 데비는 거듭 빌리의 옆구리를 찌르지만 빌리는 데비의 유혹에 반응하지 않는다. 

윌킨슨은 그런 데비를 보면서도 빌리가 데비의 애정공세에 답해 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윌킨슨과 빌리의 사이에 있는 공감대는 오로지 춤 하나 뿐인 것처럼. 관객이 윌킨슨의 이름을 듣는 처음이자 마지막 순간은, 빌리의 아버지가 크리스마스 날 빌리의 춤추는 모습을 본 뒤 자신이 빌리의 미래를 망쳤을지도 모른다는 자각이 들어 애써 용기를 내어 윌킨슨 선생을 찾아갔을 때다. 문이 열리고 술에 잔뜩 취한 윌킨슨의 남편이 나와 집 안을 향해 외친다. “산드라!” 

그렇다. 윌킨슨 선생의 이름은 산드라다. 윌킨슨은 단 한 번 등장하는 그 남편의 성이다. 하지만 산드라는 내내 윌킨슨으로만 불린다. 윌킨슨의 냉정한 모습은 뮤지컬 안에서 한 번 더 깨지는데, 빌리가 처음 오디션을 보러 가기로 한 날 파업 때문에 집에 머무는 아버지와 형 때문에 약속한 장소에 나오지 못했을 때다. 윌킨슨은 이성을 잃고 빌리의 집으로 당당하게 쳐들어와서 빌리의 꿈이 뭔지 온 집안 식구들 앞에서 본의 아니게 까발리고 만다. 그리고 빌리의 당황한 얼굴과 그보다 더 황당해 하는 아버지와 형의 얼굴을 보고 사태를 깨닫는다. 

그 때 윌킨슨은 이제 빌리의 꿈이 끝장났다고 생각하지만 빌리의 꿈은 그 지점에서부터 오히려 더 격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한다. 윌킨슨은 빌리가 그토록 가족들에게 조심스레 숨겨왔던 꿈을 온 세상에 외치고 그 꿈을 공론화한다. 

윌킨슨이 냉정함을 유지하는 이유는 그를 둘러싼 혹독한 환경 때문이다. 이별과 고통에 익숙해져 있기에 빌리의 좌절의 순간을 자신의 냉정함으로 받쳐주는 인물이다. 빌리는 그 냉정함의 커버를 뚫고 들어온 최초의 제자다. 비록 뮤지컬의 제목은 빌리 엘리어트지만, 그 옆에 아주 아주 작은 글씨로 산드라 윌킨슨 선생님이 쓰여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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