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TERTAINMENT

나의 넷플릭스가 이럴 리 없어

넷플릭스의 한국 진출이 발표되던 날, 모두가 환호했다. 나도 그 중 한 명이었다. 한국형 스트리밍 서비스 - 결제는 채널별로 나눠 하지만 광고는 봐야 하며 화질은 구리고 자꾸 끊기는 데다 온통 국산 콘텐츠 뿐이라 보다가 좌절하는 - 를 탈출해 드디어 입맛에 맞는 콘텐츠를 적절한 돈을 내고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토렌트 파일을 찾아 헤매며 느꼈던 짜증, 별 해괴한 조선번역 자막을 보는 고통에서 해방된다 생각하니 오히려 돈을 낼 날이 기다려질 정도였다. 그렇게 나는 올해 1월 25일, 넷플릭스 결제를 시작했다.

첫 달: 생각보다 빈약하지만
이 정도면 양반이지

가입은 간편했다. 결제도 간편했다. 아마존에서 물건을 살 때처럼 카드 번호를 등록해 놓기만 하면 끝이었다. 게다가 넷플릭스는 한국 진출 기념으로 한 달의 무료 프로모션 기간을 제공했다.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탐색을 시작했다.

생각보다 콘텐츠가 많지 않았다. 오픈한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지, 번역에 시간이 조금 걸려서인지 넷플릭스의 시그니처 드라마인 <하우스 오브 카드>도 없었다. 

넷플릭스의 한국 영화 섹션 중 일부.

그나마 드라마는 나은 편이었다. 영화 섹션은 더 빈약했다. ‘한국 영화’ 카테고리에는 롯데가 배급사인 살짝 망하거나 더 망한 영화만이 보였다. 그마저도 몇 편이 없었다. 뚜껑을 열어보니 김이 샜다. 한국 드라마도 거의 없었다. 한국 영화사, 방송사 등이 넷플릭스를 한 마음 한 뜻으로 보이콧하고 있기 때문이다.

CJ E&M의 한 관계자는 "넷플릭스는 콘텐츠를 일괄적으로 구입하고 수년 간 이용하는 '단건매매' 를 고집해 콘텐츠 공급을 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못박았다.
- 서울경제신문

그래도 공짜로 주어진 한 달은 채워 쓰자 싶어서 넷플릭스가 추천해주는 드라마와 영화를 보기로 했다. 메인 화면에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이 소개돼 있었다. 그렇게 나는 넷플릭스의 수렁에 빠졌다.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의 오프닝. 사진 제공 = 넷플릭스

첫 에피소드를 보고 3일 동안 밥과 넷플릭스, 침대에서 넷플릭스, 화장실에서 넷플릭스… 무엇을 하든 넷플릭스를 켰다. 그렇게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을 정주행하고 <나르코스>를 보고, 중간중간에 스탠드업 코미디도 봤다. 물론 몇 개는 실패여서 보다 껐지만.

사진 제공 = Fox Network

<나르코스>를 보다가 <고담>도 시작했다. 범죄와 마약으로 내 인생도 덩달아 찌든 것 같은 기분이 느껴지면 ‘가족 및 아동' 섹션으로 넘어가서 드림웍스 애니메이션 영화들을 봤다. <드래곤 길들이기>, <장화신은 고양이> 등등… 예전에 몇 번씩 봤지만 또 봐도 별 무리가 없는 애니메이션들을 보고 다시 고담시와 마약왕을 보러 갔다. 그렇게 한 달이 훌쩍 지나갔다.

둘째 달: 
Here comes the BBC

3월 초가 되자 넷플릭스에 BBC를 포함한 영국발 콘텐츠가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비록 시즌 5부터지만) <닥터 후>를 비롯해 <셜록>, <미스핏츠>, <IT 크라우드>, <블랙미러> 등이 들어왔다. 봤거나 보고 싶거나 볼 예정이었던 드라마가 잔뜩 들어오자 신이 났다. 영화도 빈약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늘어났다.

다큐멘터리 <헌팅 그라운드>의 공식 포스터

더불어,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다큐멘터리들이 등장했다. <헌팅 그라운드>는 레이디 가가의 OST를 들었을 때부터 매우 보고 싶은 다큐멘터리였지만 한국의 자막 및 토렌트 업자들은 이 다큐멘터리의 존재를 무시하고는 했는데, 넷플릭스에 정식으로 수입이 됐다. 이 외에도 <트루 코스트><누가 에런 슈워츠를 죽였는가>, <아타리: 게임 오버> 등 다양한 소재를 다루는 질 높은 다큐멘터리들이 라인업에 합류했다.

하지만 미숙한 자막이 계속 눈에 걸렸다. 맞춤법 오타가 자주 등장하는가 하면 (안/않, 했/햇, 니/네) 맥락상 존댓말을 쓸 이유가 하나도 없는 여자 등장인물들이 자꾸 남자 등장인물들에게 존댓말을 해댔다. 옛 추억에 젖어 <아내의 유혹>을 보듯이 <가십걸>을 정주행하면서 조선번역된 자막을 꾸준히 만났다. 20년간 서로를 사랑한 아내와 남편인데 아내만 남편에게 존댓말을 쓰는 등의 '강제 조선번역'은 불편함을 주기에 충분했다. 

한국 넷플릭스 측은 자막에 이의가 있거나 불편사항이 있으면 고객센터에 바로 알려달라고 했고, 시청자들은 열심히 제보했다. 하지만 항의하는 사람의 수보다 해괴한 번역을 계속하는 스크립터들의 수가 더 많은 것은 분명했다. 그런 자막은 꾸준히 눈에 띄었으니 말이다. 

셋째 달: 다시는 한국의 영등위를
무시하지 마라

“[단독]‘19禁’ 마구 풀던 넷플릭스 급제동”

4월 20일자 동아일보의 보도다. 동아일보는 넷플릭스가 “국내 상륙 초기 ‘한 달 이용료 무료’를 앞세워 인기 몰이에만 급급하다 국내 규제에 대한 대응을 소홀히 하면서 문제를 일으킨 것”이라고 보도했다. 다분히 친 영등위적인 해석이라 할 수 있겠다. 기사의 말미에서 영등위 관계자는 ‘이제 넷플릭스도 한국법을 준수하겠다고 했으나, 적극적으로 영상물 등급 분류 신청을 하지는 않는다'며 곧 넷플릭스가 제공하는 영상들에 한국식 ‘등급'을 매길 것을 시사했다.

사진 제공 = ABC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을 비롯해 <하우 투 겟 어웨이 위드 머더> 등 이른바 ‘19금'에 해당하는 드라마 몇 편이 임시로 내려가더니, ‘성인 인증'이 생겼다. 핸드폰 번호로 성인 인증을 거쳤다. 넷플릭스가 서비스되는 국가 중 성인인증을 거치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그리고 나서 돌아온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에는 블러가 생겼다. 사용자들은 돈을 내고 성인인증을 거쳤는데도 영상에 블러 처리를 해 버린 것에 불만을 터뜨렸다. <선암여고 탐정단>의 악몽이 스쳐 지나갔다. 여성-여성 키스씬만으로도 기함을 하며 제재를 가하던 영등위의 눈에 레즈비언 섹스가 (자주) 등장하는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이 어떻게 보였을지는 충분히 상상이 간다.

<하우스 오브 카드> 시즌 4 포스터. 제공 = 넷플릭스

드래그 퀸들이 등장하는 <루폴의 드래그 레이스>도 내려갔다. 지인에게 추천받아 정주행중이던 <루폴의 드레그 레이스>가 한순간에 사라졌을 때, 처음으로 넷플릭스를 해지할 생각을 했다. 이외에도 영등위가 보기에 ‘껄끄러웠을' 영상들이 사라졌다. (지금은 차차 복구되고 있다.) 동시에 CJ E&M의 유료 케이블 채널 ‘캐치온'은 ‘블러 없는 성인 채널'이라는 광고를 하기 시작했다. 넷플릭스에는 대체 왜 블러가 생긴 걸까?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곧바로 <하우스 오브 카드>가 최신 시즌까지 모조리 업데이트 되는 바람에 해지할 생각이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렸다. 게다가 넷플릭스는 한 달의 무료 프로모션을 추가해 줬다. 그렇게 나는 다시 넷플릭스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 했다.

넷째 달: 아 됐고 해지합니다

복구된 <루폴의 드래그 레이스>와 업데이트된 <하우스 오브 카드>를 즐기던 중, 등록한 계정으로 안내 메일이 도착했다. ‘결제 정보 업데이트 필요'. 제목이 불길했다. 예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결제 처리도 ‘한국화' 해서 이제 PG 플러그인이 뜨고, 엑티브액스가 뜨는 줄 알았더니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대신 사용자의 생년월일을 받기 시작했다. 결제수단을 본인이 소유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 과정은 간단했다. (여전히 넷플릭스에서는 아름답게 자동 결제가 된다.)

넷플릭스의 수난을 함께 겪으며, 결제 정보를 업데이트하고 나서 서비스 해지를 결심했다. 앞으로 넷플릭스를 한국이 어떻게 꺾으려 할 지, 그 예고편을 본 느낌이었다. 한국의 벽은 높았다. 넷플릭스가 넘어서야 할 높은 장벽은 시청자의 까다로운 취향도 아니고, 유료 결제에 인색한 사람들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넷플릭스가 한국에 제공하는 그다지 넓지 않은 선택지도 받아들였고, 유료 자동 결제에도 쉽게 적응했다.

진정한 벽은 엑티브엑스, 담배와 섹스 블러, 영상물 심의와 등급제 같은 것들이다. 이 벽이 넷플릭스와 사용자를 갈라 놓으려고 애쓰고 있다. 영등위의 넷플릭스 영상 블러 처리는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으로 시작해 어디까지 적용될 지 모른다. 심지어 영등위에는 넷플릭스 측에서 요청한 심의를 정상적인 속도로 처리할 인력도 없다. 넷플릭스는 블러투성이 영상과 성인인증, 결제 수단 추가 인증으로 한국에서 가위질 당했다. 

슬픈 하향평준화의 운명

서비스 오픈 후 넷플릭스를 한 마음 한 뜻으로 조롱하고 비난해온 언론들은 지금의 상황을 보며 기세등등할 것이다. 앞의 동아일보 기사도 그렇고, ‘사용 요금이 자동으로 결제되는 데 사용자한테 제대로 알리지도 않고 해지도 어렵다'고 비난한 조선일보 기사도 그렇고, (조선일보 정기구독을 해지하는 것보다 넷플릭스 멤버십 해지가 훨씬 빠르고 쉽고 간편할 것이다) 넷플릭스를 배척하는 데 온 힘을 다한 언론들의 협동 공격은 앞으로도 꾸준할 것이다.

몇 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서비스를 접었다가 ‘우버 블랙'으로 간신히 한국에 다시 돌아온 우버의 잔상이 보인다. 넷플릭스는 한국에 진출해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의 은총과 10초 후 자동 재생의 위대함을 나누어 줬다. 하지만 한국에서 제공되는 영상 스트리밍 서비스가 넷플릭스를 따라 상향평준화되는 일은 없었다.

슬픈 하향평준화의 운명이여. 그들은 제자리에 머무르고 넷플릭스가 내려왔다. 간편한 결제는 덜 간편한 결제로, 간편한 가입과 인증은 덜 간편한 인증으로, 깨끗한 영상은 뿌연 영상으로. 넷플릭스의 발목이 잡히는 것을 보며 한국의 스트리밍 서비스 사업자들은 모두 마음 속으로 잔치를 열었을 것이다. 전자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방송업계 관계자는 “사실 많은 국가에서 코드커팅 현상을 일으킨 넷플릭스라서 걱정을 했지만 뚜껑을 열고 보니 볼만한 콘텐츠가 많이 없고 업데이트도 대량으로 되지 않아 현재로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2016년 3월 기준 코리안클릭이 발표한 넷플릭스의 일일 이용자 수는 5~6만명이다.

스트리밍 서비스를 넘어 제작자로도 자리를 잡은 넷플릭스는 한국에서도 봉준호 감독과 함께 영화 <옥자>를 제작한다고 발표했다. 우리는 2017년에 공개가 예정된 <옥자>를 '그대로' 볼 수 있는 걸까? 영등위에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넷플릭스가 그때까지 버텨주기라도 하면 다행이다. 

2016.10.24 12:45 발행

CREATOR

핀치클럽에 가입하세요

핀치의 모든 콘텐츠를
무제한으로 열람할 수 있습니다

더 나은 여성의 삶,
더 많은 여성의 이야기,
더 많은 여성 작가 작품에 함께할 수 있습니다

핀치클럽 한정 정기 굿즈는 물론,
크리에이터와의 대화 등 핀치의 행사에
우선 초대 혜택이 제공됩니다.

이 크리에이터의 기사

넷플릭스에 관한 다른 기사

드라마에 관한 다른 기사

You may also like

기사 더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