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CH & GEAR

아델라의 브랜치: 2. 걸스로봇

딱히 내가 여대생이니까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던 건 전혀 아닌데, 어딜 가나 원피스를 제일 많이 입고 다녔다. 화장은 안 해도 원피스는 꼭 입고 나갔다. 가랑이를 옥죄지 않는 원피스가 정말 편하거든. 봄에는 꽃과 잘 어울리는 원피스, 여름에는 바람이 잘 통하는 하얀색 민소매 원피스, 가을에는 분위기 있는 원피스, 겨울에 검정 스타킹을 신어도 모직 원피스를 입었다.

그런데 개발자들과 팀 프로젝트를 하거나 네트워킹을 할 땐 어쩐지 내 옷이 너무 튀어 보이는 것 같았다. 약속이라도 한 듯 여럿이서 입고 있는 구글이나 깃헙 로고가 찍힌 무채색 티셔츠는 대체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런 티는 보통 공식 홈페이지에서 팔며, 개발자들은 그걸 직접 사 입는다는 것을 알고서는 너무... 놀랐었다.) 그에 비해 나의 오렌지색 꽃무늬 원피스는 너무 밝은 게 아닌가 싶었고, 점점 나도 무채색 옷을 입게 되었다.

그리고 일단 이 오렌지색 꽃무늬 원피스를 입으면 첫인사 때 “IT 쪽 분이 아닌 줄 알았어요!”라는 말을 들을 확률이 높아진다. 자기소개를 안 하면 더 심각해진다. 개발자 컨퍼런스에서도 안내 데스크 직원으로 오해받거나, 음식을 치우거나 정리해야 할 땐 나에게 도움을 구한다. 저기, 나도 여기 게스트로 왔는데요. 이럴 땐 기술에 대해 궁금해서 저 사람에게 말을 걸어볼까 해도, 저 사람은 이미 나를 스태프라고 규정하는 것 같아 뒷걸음질 치게 된다.

하지만 걸스로봇은 보라색 주름 치마를 입은 사진과 함께 ‘우리는 로봇을 하는 여자들’ 이라며 자신을 소개한다. 걸스로봇 이진주 대표와 만나던 날, 그와 나는 우연히 색깔만 다른 셔링 블라우스를 입었더라. 어? 하고 우리 둘은 마주보며 깔깔 웃었는데 그때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그래 이렇게 입으면 좀 어때!

About Girls’ Robot

Q. 안녕하세요, 걸스로봇은 무엇인가요?

진주: 로봇 하는 여성들의 네트워크라고 하면 추상적이지요? ‘걸스로봇’은 페미니즘을 실천하는 이공계 여성 네트워크입니다. 단순 커뮤니티는 아니고 소셜 임팩트와 수익성까지 고려하는 소셜벤처에요. 또한 ‘로봇’은 실제 로봇을 뜻하기도 하고, 여성이 있는 이공계 분야도 상징합니다. 걸스로봇은 더 많은 여성이 이공계 분야에 진출해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돕는 캠페인과 네트워킹을 하고 있습니다.

사진제공: 걸스로봇

Q. 걸스로봇의 역사가 궁금합니다.

2015년 12월 20일, 런칭 파티 ‘Girls in Robotics’로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습니다. 설립은 2015년 11월 11일이었지만요. 런칭파티에 모신 연사는 다섯 분으로, 로봇 연구를 하시는 국내외 톱클래스 여성 연구자들이었습니다. 참가자들은 150명 정도였는데, 여성은 80여 명이 참석했습니다.

그 이후로는 <퍼블리>에서 진행했던 프로젝트 ‘카이스트의 여자들'에 KAIST의 여성 교수님을 포함한 학내 여성 구성원과 그들의 삶과 학문에 관심 있는 남성 구성원을 인터뷰했었습니다. 또한 카이스트와 포스텍을 비롯한 5개 지역거점 과학기술 중점대학 페미니즘 연합체 ‘페미회로'와 ‘마고', ‘포스텍페미니즘' 등의 여학생 모임을 지원하는 한편, WISET(한국 여성 과학 기술인 지원센터) 과도 협력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네트워크를 마련하고 여러 학술행사 세션을 담당하여 구성하고 있습니다.

Q. 걸스로봇에 참여한 사람이 커리어 성장에 도움을 받았던 사례가 있나요?

이세리님의 이야기를 하게 되네요. 세리님은 국민대학교 4학년으로 조백규 교수님 지도로 <KUDOS>라는 로봇축구 동아리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걸스로봇 펠로우로 선정되면 1년 동안 매월 세후 200만 원의 장학금을 받고, 해외 학회 파견, 제휴 매체 데뷔 등의 혜택을 받습니다.

이세리 펠로우는 지난해 멕시코 칸쿤에서 열렸던 휴머노이드 로봇의 최대 학회, ‘휴머노이드(Humanoids)2016’에 가 데니스 홍 교수님을 인터뷰 =하였습니다. 올 초에는 라스베가스에서 열린 CES 2017(Cosumer Electronics and Consumer Technology TradeShow)’에 참석하고, ‘퍼블리’를 통해 보조 저자로 데뷔했습니다. 오토살롱 무대에도 섰지요.이번 5월에는 도쿄에서 열리는 'Gender Summit2017'을 참석할 예정이고, 올 7월에는 일본 나고야에 가서 ‘로봇 컵(Robot Cub)2017’ 행사 진행을 돕습니다. 동영상을 찍고 실시간 방송도 하자면서 제안이 들어왔었거든요!

세리님에 대한 걸스로봇의 단기적 목표는 유학입니다. 세리님이 이런 실적으로 좋은 평판을 쌓고 네트워크를 키움과 동시에 본인도 훌륭한 학교에 들어간다면, 2기 펠로우에는 더 많은 인재가 걸스로봇의 이름으로 활동하게 될 것 같습니다. 걸스로봇의 정신을 가진 한 사람이 운동을 확산시킨다면 펠로우의 성공이 걸스로봇의 성공이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Q. 걸스로봇의 목표는?

여자는 당연히 사범대학을 가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세상에 만연한 편견에 자유롭게 하고 싶어요. 제가 그 편견대로 움직였거든요. 그러니 자신의 취향대로 살 수 있는 시대가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취향을 가지든, 장애를 가지든,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든, 여자가 여자를 사랑하든, 옷을 아무렇게나 입든, 눈치 보지 말고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Q. 다른 로봇 커뮤니티에 비했을 때 걸스로봇 만의 매력이 있다면?

여성들이 많다는 점? 여성들이 한자리에 모이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당당해질 수 있습니다. 자기 연구실에서 있었던 이야기도 좀 더 편하게 할 수 있게 되지요.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들 속에서 거리낌 없이 좋아하는 일을 좋아할 수 있습니다.

Q. 최근에 열린 걸스로봇 행사는 어떤 것이 있나요?

4월 22일에 지구의 날을 맞아 ‘함께하는 과학 행진(March for Science)’ 행사에 참여했습니다. 이 행사는 ‘과실연’(바른 과학기술사회 실현을 위한 국민연합)과 ESC(Engineers and Scientists for Change)가 공동주최 하였습니다.

‘표지모델 되기’, ‘여성 과학자와 사진 찍기’, 등을 체험할 수 있는 부스를 운영했고요. 

사진제공: 걸스로봇

여성 혐오적이며 반과학적인 대통령이 당선되자 이를 반대한다는 의미로 핑크색 모자를 쓰고, 피켓에 문구를 대충 휘갈겨서 사람들이 모여 이뤄졌던 행진 ‘Pussy Hat Project’를 벤치마킹 했습니다.

핑크 랩(pink lab)이라고 팝업 부스도 열었어요. 부스를 분홍색으로 꾸며 연장을 분홍락카로 칠하고, 큐빅을 박아서 부스에 놀러 온 여성들이 신나게 사진을 찍고 놀 수 있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제일 좋았던 부스는 메이크업 부스였어요!

Q. 부스 컨셉 컬러를 굳이 핑크로 하는 이유가 있나요?

만물에 핑크색을 끼얹는 걸 ‘핑키피케이션’이라고 하더라고요. 미국 페미니즘 운동에선 사실 폐기 단계의 전략인데, 우리나라에선 아직 중간단계로서의 핑키피케이션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동안은 분홍색이란 색깔이 여성, 또는 이른바 여성성을 지나치게 상징해왔습니다. 어린 여자아이들이 분홍색에 집착하는 것이 본능인지 학습인지 알 수 없게 뒤섞여 버릴 정도로요. 하지만 실은 2차 대전 이전까지는 여성의 색은 분홍색이 아니라 하늘색이었습니다. 오히려 고귀한 남성들을 악마로부터 보호해준다는 의미에서 남성의 색이 빨간색이나 작은 빨간색인 분홍색으로 인식됐었습니다. 그러다 전쟁 중 네이비의 활약으로 파란색이 남성성을 상징하는 강인한 색으로 추앙받게 되었고요.

저는 색깔과 성, 성역할에 대한 이런 편견을 역으로 활용하고 싶었습니다. 과학적인 것은 남성적이라는 관습적인 인상을 무너뜨리기 위해 일부러 분홍색을 장비와 도구와 연장에 뿌려 보기로 한 것입니다. 리본도 붙이고 보석도 달고 스티커도 바르는 식으로요.

메이크업을 진하게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성에게만 외모를 꾸미라는 압력이 가해지는 것도 차별이지만, 꾸미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게 하는 것 역시 차별이잖아요. 특히 남성들의 놀이터인 이공계에서는 여성들이 수적으로 소수이다 보니, 스스로를 검열하고 억누르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요, 그럴 필요 없다는 걸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지위와 능력과 외모와 취향 사이에 어떠한 상관관계도 없다는 외침인 거죠. 기왕이면 엄청난 스케일로 보여주고 싶어서 열두 분의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모셨습니다. 덕분에 부스가 무척 북적였습니다.

사진제공: 걸스로봇

이런 퍼포먼스는 사실 2년 전 걸스로봇 런칭파티 때부터 기획했었는데, 그 때는 너무 이른 시도라 받아들여지기 어려울 것 같아 접고 말았어요. 그런데 올해 초 AAAS(American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Science)라고 <사이언스> 매거진을 발간하는 전미과학진흥협회 연례회의에 갔더니, 신규 멤버십 가입자들에게 풀 메이크업을 해주고 프로필 사진을 찍어주더군요. 엄청난 흥행을 기록했지요. 저로선 선수를 뺏긴 것 같아 아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드디어 레퍼런스가 생긴 셈이었죠. 그래서 망설임 없이 시도해 볼 수 있었습니다.

이진주는 누구야?

Q. 걸스로봇을 인터뷰하다 보니 이진주 대표님에 대해서 궁금해졌어요.

저는 과학영재로 공대에 진학했지만 한 학기 만에 나와 재수를 했습니다. 그로부터 스무 해, 과학과 관계 없이 살다가 다시 돌아와 저 같은 소녀들이 저처럼 살지 않도록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습니다.

Q. 대표님이 로봇 분야로 파고들게 된 계기는?

저는 문과 과목을 선택해 재수를 한 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사범대로 진학하였습니다. 무슨 과든 골라갈 만큼 성적이 잘 나왔는데도요. 소명 의식 없이 사범대에 들어왔기 때문에 4년 동안 의문에 가득찬 시간을 보냈어야 했습니다. 저는 졸업 후 유학을 가고 싶었는데, 전공을 다시 정하는 일도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 반대로 무산되었습니다. “여자가 유학 가면 시집 못 간다"는 걱정 때문이었죠. 그리고 나서 모 회사의 해외 마케팅을 1년 반 정도 하다, 아나운서 준비를 했는데 잘 안 됐습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시험에 떨어지고 당시 사귀던 남자친구와 결혼을 했는데, 그 때가 만으로 스물 여섯이었습니다.

신혼 한 달쯤에 멍하니 티비를 보았는데 같이 공부를 했던 친구가 휴보를 만들었다고 뉴스가 뜨더라고요. 그 친구는 고등학교 과학 영재 시절 같은 반, 같은 조였던 친구 박일우 광운대 교수입니다. 충격이었죠. 친구는 미래를 향해 가고 있는데, 저는 계속 과거에 머무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렇게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무작정 학회로 뛰어들어갔어요. 로봇 학회였던 이유는 제 과학 영재 시절의 이상향이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쟤 누구야? 전공자도 아닌데 왜 와?’ 라며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계속 찾아가다보니까 로봇에 관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로봇 학회의 커뮤니티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제게까지 기회가 닿았거든요. 제가 직접 교수님들을 뵙고 궁금한 것들을 여쭤보면서 궁금증도 해결하였고, 젊은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돕는 데에서 대리 만족을 느꼈습니다. 덕분에 지금은 무시 당하지도 않고요.

이진주 X Robotics

Q. 대표님이 생각하는 로봇에 대한 편견은?

로봇은 ‘풀메탈 바디(full-metal-body)’다? 요즘 나오는 로봇들을 보면 아시겠지만, 하드 로봇 뿐만 아니라 소프트 로봇, 소셜 로봇도 있거든요. 백인 남자만이 사람이 아니듯, 풀메탈 바디가 로봇의 전부가 아닙니다.

소프트 로봇 개발은 이탈리아 생물로봇 교수 세실리아 라스키(Cecilia Laschi)가 최초로 시도했습니다. 소프트로봇의 예로는 하버드에서 만든 벌처럼 생긴 로봇, 우아하게 몇 미터를 뛰는 소금쟁이 같이 생긴 로봇, 그리고 손 장갑 모양의 로봇 등이 있습니다. 마비환자에게 도움을 주거나 사람이 못 들어가는 곳을 뱀처럼 생긴 로봇이 구불 구불 타고 들어가기도 합니다. 

세실리아 라스키는 흥미롭게도 여성이었어요. 그는 소프트 로봇으로 ‘문어로봇’을 만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욕을 많이 먹었죠. 풀메탈이 아니니까요! 그런데 이 소프트 로봇에는 장점이 아주 많습니다. 하드 로봇은 스탭이 꼬여서 넘어지면 대형사고인데 소프트 로봇은 그렇지 않습니다. 평평하지 않은 땅에서 벌어지는 돌발 상황에도 잘 대응하고, 컵을 부수지 않고 부드럽게 잘 잡기도 합니다. 요즘은 연구비가 다 소프트 로봇으로 몰리는 추세고요.

풀메탈 바디가 아닌 또 다른 로봇으로는 소셜 로봇이 있습니다. 정보를 흡수하는 플랫폼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소셜로봇 역시 MIT 교수 신시아 브리질(Cynthia Breazeal)이라는 여성 공학자가 의미 있는 성과를 내놓았습니다. 그가 만든 ‘지보(gibo)’는 날씨나 시간을 알려주고, 피자를 주문해주는 기능 뿐만 아니라 데이터를 모으는 일종의 플랫폼 기능을 합니다.

이렇게 세상에 없던 새로운 로봇을 내놓은 이들이 여성들이라는 건 다양성이 이 분야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을 증명한다고 생각합니다.

Q. 우리나라 테크 커뮤니티가 바뀌어야 할 점은?

‘여적여’.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은 정말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좁은 사회라 여자들과 경쟁하는 게 되게 두드러져 보이는데, 소수자인 여자들끼리 물어뜯고 끌어내리는 건 대단히 소모적이죠. 자릿수가 제한된 높은 곳에 올라가려고 경쟁하다 보면 남녀를 불문하고 다툼이 생기는데 그걸 유독 여자만 그런다고 프레이밍 하는 건 남성들의 전략일지도 몰라요. 또 현상적으로 쎈 여자, 독한 여자들이 살아남을 확률이 높을 수도 있겠죠. 그러다보니 리더급 여성들의 특징이 특정하게 유형화되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건 여자가 갈 수 있는 자리의 개수를 늘리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입니다.

드러낼 수록 평범해지는 것들

“저는 조금 더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삶을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진주 대표는 더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편안하게 할 수 있을 때까지, 그는 듣고 말하고 전하는 일을 계속하겠다고 했다.

걸스로봇이 주최했던 토크 콘서트 때, 모 여성 교수님께서 ‘오늘은 로봇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을 겁니다.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요. 오늘은 여성들이 왜 이 자리에 모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 할 겁니다.’라고 하신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자 남학생들이 굉장히 혼란스러워 했고, 왜 우리가 이것을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분위기가 이어졌었다. 하지만 로봇 학문의 권위자이셨던 여성 교수님이 역설하시니 남학생들도 점차 수긍했다던 일화를 접했다.

여성이 자신의 말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르는지 우리는 안다. 그래서 우리는 조금 더 힘을 내고, 조금 더 훌륭해져야 한다. 물론, 그는 지금도 충분히 대단하다.

2017.05.16 15:04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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