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줍는 시 5 - 기다림을 향하여, 친구를 위하여

생각하다문학

다시 줍는 시 5 - 기다림을 향하여, 친구를 위하여

신나리

일러스트레이션: 솜솜

<목련>


뭐해요?

없는 길 보고 있어요

그럼 눈이 많이 시리겠어요

예, 눈이 시려설랑 없는 세계가 보일 지경이에요

없는 세계는 없고 그 뒤안에는

나비들이 장만한 한 보따리 날개의 안개만 남았네요

예, 여적 그러고 있어요

길도 나비 날개의 안개 속으로 그 보따리 속으로 사라져버렸네요


한데

낮달의 말은 마음에 걸려 있어요

흰 손 위로 고여든 분홍의 고요 같아요


하냥

당신이 지면서 보낸 편지를 읽고 있어요

짧네요 편지, 그래서 섭섭하네요

예, 하지만 아직 본 적 없는 눈동자 같아서

이 절정의 오후는 떨리면서 칼이 되어가네요

뭐 해요?

예, 여적 그러고 있어요

목련, 가네요

- 허수경, <목련>,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문학과지성사, 2016, 50-51쪽.

햇수로 따지자면 벌써 시를 쓴 지 6년이 되었다. 

처음부터 시를 읽고 쓰는 일을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어릴 때는 소설을 좋아했다. 방학 때면 외할머니 댁에 가곤 했는데, 외할머니 댁의 끝방에는 삼촌의 서재가 있었다. 삼촌은 소설을 읽고 쓰는 일을 좋아하는 학교 선생님이었다. 삼촌의 서재에서 정말 많은 책들을 읽고 놀았다. 그러다 삼촌이 돌아가시고 그의 책들을 모두 물려받게 되었다. 물론 삼촌과 나의 취향은 달랐기 때문에, 나는 삼촌의 책들 중 이문열보다는 박완서를 골랐고 그렇게 만든 책 보따리를 서울로 가져오게 되었다.

고교 시절 내내 논술학원을 다녔다. 나는 대학 입시 바로 직전까지 논술 글쓰기라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논술학원의 선생님들은 다정한 성격에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했다. 그래서였는지 선생님들은 나의 문학도 논술도 아닌 정체 모를 글들을 눈 감아 주었다. 무엇을 쓰고 싶다, 어떤 장르의 글을 쓰고 싶다는 구체적인 생각은 없었다. 그저 무엇인가 읽고 쓰는 일이 즐거워서 계속 했다. 그러다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때부터는 본격적으로 무엇을 쓰면 좋을까? 하는 고민을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소설을 썼다. 

내가 읽은 것들 중 소설의 비중이 가장 컸기 때문이다. 대학 주변에서 하는 이곳저곳의 소설 창작 모임들을 찾아다녔다. 그 과정에서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사람들과 합평을 하기 위해 매번 소설 비슷한 것을 꾸역꾸역 써갔다. 사람들은 내 글을 읽고 이건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서사의 힘이 부족하다고 이야기했다. 실제로 나는 이야기를 길고 그럴싸하게 지어내는 데는 소질이 없었다. 내가 글을 쓰는 데 있어 집착했던 것은 감각이나 이미지였다. 사람들의 평을 듣고 돌이켜보니 소설을 읽을 때도 나는 감각적으로 좋다고 느끼는 문장들에 줄을 긋는 사람이었다. 또한 언제나 소설을 읽고 나면 작품의 줄거리보다는 장면이나 문체가 머리에 남는 사람이었다. 보다 정확히는 마음에 남았다고 할 수 있겠다.

같이 글을 썼던 사람이 시나 희곡 쪽으로 가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했다. 

그러면 그럴까 싶어서 시 창작 수업에 등록했다. 2012년 겨울이었다. 나는 정말로 어렸고 나오는 대로 썼다. 시를 쓰려고 보니 먼저 시를 읽어야 할 것 같아서 그때부터 시를 읽기 시작했다. 그 시간들이 내게는 정말 좋았다. 소설을 읽으면서 장면, 문장에 줄을 긋고 그것들을 모아 노트에 필사했다면, 시를 읽으면서는 시집 자체가 내 노트가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는 시를 더 잘 읽고 싶었고, 시를 읽고 이 작품이 왜 좋은지 보다 분명하게 표현하고 싶었다. 대학원에서 현대시를 전공하고 시를 읽고 쓰는 시간들을 보내며 지금이 되었다.

마음을 깊게 들여다보는 일

시를 읽고 쓰는 일은 나와 타인의 마음을 깊게 들여다보는 일이라고 믿었다. 나는 그런 일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었고 그런 일을 하면서 살면 좋을 것 같았다. 그 생각이 지금껏 나를 시 곁에 붙잡아 둔 것 같다. 물론 문단 내 성폭력 운동 이후에는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시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수많은 욕망이 있고 그 욕망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함께 사는 생태계를 망칠 수 있다. 지금 한국 문단이 완전히 썩어서 재생 불가능한 상황에 처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나도 그 욕망들로부터 자유롭다거나 자유로울 것이라고 확신하기 어렵다. 그러나 시를 읽고 쓰는 사람이면 자신의 마음도 욕망도 들여다보고 타인과 세상에 해가 되지 않게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내가 시 곁에 계속 사는 한, 나는 그런 방식으로 살 것이다.

핀치에서 시를 읽고 경험을 나누는 작업을 하게 되면서 좋은 시들을 부러 찾으려고 노력했고 많이 읽어보려고 애를 썼다. 좋은 시를 읽으면 자연히 좋은 시를 쓰고 싶은 마음이 든다. 좋은 시라는 것은 뭘까. 때마다 다르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요즘 내게 좋은 시란 '대화가 가능한 시', '소통이 가능한 시'이다. 시를 읽고 쓰는 과정도 소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시 읽기가 타인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고 타인의 목소리를 듣는 과정이라면,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의 마음도 발견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것은 소통일 수 있지 않을까. 또 시 쓰기가 스스로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고 표현하는 일이며 그로부터 타인의 마음도 건드릴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것 또한 소통일 수 있지 않을까. 만날 수는 없어도 작품을 읽고 쓰는 과정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타인의 마음에서 내 마음을 만나는 일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두 마음이 만나는 소통 아닐까.

박상순, 진은영, 최승자, 김이듬의 좋은 시들을 읽으면서 좋은 시가 쓰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사람들마다 시를 쓰는 방식은 다를 것인데, 나의 경우 몸으로 먼저 감각하고 그 다음에 문장으로 이야기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에는 언제나 현재의 감각과 생각이 담기게 된다. 내가 쓰고 있는 것들에는 지금 이곳의 현실을 견디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외롭고 슬픈 사람이 서 있다. 얼마 전에는 내가 쓴 것들을 읽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지금 이곳의 외롭고 슬픈 이야기만 늘어놓는 작품을 누가 읽어줄까, 누가 좋아해 줄까. 만약 시 읽기와 시 쓰기가 진정 소통이 될 수 있다면, 나는 내 이야기를 늘어놓는 일과 함께 이 작품과 어디선가 닿을 그 사람을 조금은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닐까. 우리가 친구와 이야기할 때, 나의 참담하고 슬픈 삶과 마음은 구구절절 말하고 미래를 비관하면서도, 친구의 삶과 마음은 언제나 껴안아 주고 그의 미래를 응원해주고 싶은 것처럼. 어딘가에 있을 나의 친구를 위해 나는 조금은 다르게 말해야 하는 것 아닐까.

다른 곳을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힘

지금, 여기가 이렇게 버겁고 힘든데 미래, 다른 곳을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힘은 어떻게 가질 수 있는 것일까. 허수경의 시편 <목련>에는 끝끝내 한 자리에 서서 없는 길과 없는 세계를 보려는 사람이 등장한다. “뭐 해요?/없는 길 보고 있어요//그럼 눈이 많이 시리겠어요/예, 눈이 시려설랑 없는 세계가 보일 지경이에요”작품 속에서 누군가가 ‘없는 길’을 보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 일은 눈이 많이 시릴 정도로 어렵고 고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끝내 없는 길을 보고자 한다. “예, 눈이 시려설랑 없는 세계가 보일 지경이에요”라고 농담도 하면서 말이다.

없는 길을 보기 위해 애를 쓰는 사람에게 어떤 목소리가 이야기한다. “없는 세계는 없고 그 뒤안에는/나비들이 장만한 한 보따리 날개의 안개만 남아있네요” 어떤 목소리가 ‘없는 세계는 없다’라고 이야기하는데도 불구하고 없는 길을 보려는 사람은 보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예, 여적 그러고 있어요/길도 나비 날개의 안개 속으로 그 보따리 속으로 사라져버렸네요”그리고 그는 끝끝내 무엇인가를 본다. 그리고 그는 당신이 보낸 편지를 읽게 된다. “하냥/당신이 지면서 보낸 편지를 읽고 있어요/짧네요 편지, 그래서 섭섭하네요”

그가 보고 읽은 것이 ‘없는 길’인지 ‘없는 세계’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곳에 오랫동안 서서 없는 길을 보려는 사람에게는 기필코 무엇인가가 도착한다. 마음에 걸린 낮달의 말과 당신이 지면서 보낸 편지. 그리고 그는 어떤 목소리가 다시금 물을 때 다시금 대답한다. “뭐 해요?/예, 여적 그러고 있어요/목련, 가네요” 지금, 여기에 서서 미래, 다른 곳을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힘은, 어쩌면 계속 없는 길과 없는 세계를 보려는 기다림의 과정 속에서 솟아나는 것 아닐까.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 나는 허수경처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허수경처럼 기다리고 싶다.

시집의 앞에 실린 시인의 말을 덧붙인다. 어디선가 이 글과 닿을 나의 친구를 위하여. “아직 도착하지 않은 기차를 기다리다가/역에서 쓴 시들이 이 시집을 이루고 있다//영원히 역에 서 있을 것 같은 나날이었다//그러나 언제나 기차는 왔고/나는 역을 떠났다//다음 역을 향하여//2016년 가을/허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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