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줍는 시 7. 보리차가 끓는 시간, 언 발이 녹는 시간, 교차!

생각하다문학

다시 줍는 시 7. 보리차가 끓는 시간, 언 발이 녹는 시간, 교차!

신나리

일러스트레이션: 솜솜

일상

나는 아침 8시 반에 일어난다. 눈을 뜨고 이불을 개고 책상 위에 놓인 위장약을 두 알 먹는다. 책상 위에는 어제 두었던 물 잔 하나. 거의 매일 나쁜 꿈을 꾸고, 깨어나도 꿈들이 선명한 경우가 많다. 휴대폰 메모장에 간밤의 악몽을 기록한다. 근래 내가 어떤 스트레스를 어떤 방식으로 받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지표. 아침을 먹는다. 시리얼과 과일을 먹거나 현미밥에 인스턴트 김. 밥 먹고 바로 도시락을 싼다. 샌드위치나 유부초밥. 준비가 끝나고 방으로 돌아가 책상에 앉는다. 뉴스도 보고 sns도 보면서 잠을 깬다. 욕실에 들어가서 머리 감고 세수하고 이 닦고 화장하고 옷 입고. 출근!

종일 글 읽거나 글 쓰거나 밥벌이하거나 셋 중 하나다. 가끔 오전에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리거나 오후에 친구를 만나러 버스를 타고 나가기도 한다. 필요에 따라 워크샵이나 수업을 듣기도 한다. 그러나 주로 많은 시간을 작업실에서 보낸다. 작업실에서 보내는 하루는 저녁 8시쯤 마무리된다. 집에 돌아와 혼자 저녁을 먹는다. 가만히 앉아서 티비도 좀 돌려보고 논다. 저녁 10시쯤에는 집 앞 공원에 간다. 아침만큼 중요한 것이 저녁이다. 공원에 가서 호수를 본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호수 주변을 빙빙 돈다. 자정쯤 집에 돌아와 씻고 눕는다. 시집을 읽거나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새벽 1시쯤 잠이 든다.

올 겨울은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길고 추운 겨울은 처음이었으니까. 처음엔 이렇게 날씨가 이상한 나라에 산다는 것이 짜릿하고 특별하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그런 기분은 잠깐이었다. 계속되는 겨울은 나를 지겹고 짜증이 나게 했으며, 눈비가 섞어 치는 날이면 우울하게 만들었다. 또 겨울이 얼마나 잔인한 계절인지는 충분히 아니까. 아침에 일어나면 간밤에 누가 얼어 죽지는 않았는지 걱정되었다. 그랬던 겨울이 드디어 끝을 보이고 있다. 날이 따뜻해지고 밝은 낮이 길어진다. 궁금해진다. 사람들은 어떻게 이번 겨울을 견디며 지냈을까. 나는 일상을 꾸리고 일상을 지키려고 노력하면서 지냈다.

일상의 사랑

엘라이자는 저녁 9시에 일어난다. 시계의 알람을 끄고 욕조의 물을 채운다. 부엌으로 가 냄비에 물과 달걀을 넣고 가스 불을 켠다. 달걀 타이머를 돌려 욕실에 두고 욕조에 들어가 자위를 한다. 토스트와 달걀을 종이봉투에 담는다. 반쪽은 접시에 담는다, 친구 자일스의 몫이다. 달력을 뜯고 달력 뒤에 쓰인 하루의 글귀를 읽는다. 구두를 골라 구두를 반들반들하게 닦는다. 옆 방의 자일스에게 음식을 건네고 잠깐 이야기를 나눈다. 두 사람은 춤과 음악을 좋아한다. 그리고 출근! 직장 가는 길, 버스 차창에 모자나 머플러를 얹고 머리를 살짝 기댄다. 비가 오는 날이면 흐르는 물방울들의 모양을 바라본다. 언제나 조금씩 지각한다. 친구 젤다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셰이프 오브 워터> 포스터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2018)의 주인공 엘라이자의 일상이다. 이야기 속 그녀는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다. 그녀의 사랑은 일상이 확장되고 깊어지는 가운데 태어난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식사를 나누어주고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들려준다. 그녀가 자위를 하던 욕조의 물, 달걀을 삶던 냄비의 물, 차창에 기대어 바라보던 흘러내리는 빗물들. 그녀의 일상을 이루었던 물방울들은 그녀가 누군가와 감정과 욕망을 주고받고 자신의 사랑을 거침없이 끌어가는 시간 속으로 흘러 들어간다. 엘라이자의 일상과 물방울들은 형태를 바꾸어가며 그녀의 사랑을 끌어안는다. 아, 엘라이자 같은 사람이 바로 사랑을 하고 미래를 갖는구나. 자신의 일상을 꾸리고 지켜나가는 사람, 이를 통해 삶을 지속하고 견뎌내는 사람.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그려지는 엘라이자의 일상은 그녀가 얼마나 고귀하고 존엄한 사람인지를 드러낸다. 반복되는 일상의 리듬 가운데 탄생하는 사랑은, ‘엘라이자’의 사랑이 된다.

영혼의 언 발

작품 <기화>는 눈을 맞고 돌아온 너의 등을 비추며 시작한다. 기화, 액체가 기체로 변하는 현상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가장 먼저 너의 등에 쏟아졌던 눈들이 액체로 그리고 기체로 변한다. 시인은 문을 닫고 보리차를 끓인다. 밤이다. 시인은 “밤은 어떻게 보리차를 맛있게 하는가”하고 가만히 말해본다. 깨끗한 풍경의 주인공이었던 너, 발가벗은 몸이 된 너, 눈 쌓인 공원을 산책하고 돌아온 너. 네가 언 발을 녹이고 있다. 시인은 “영혼의 언 발”이라고 쓴다. 영혼의 언 발은 무엇일까, 그것을, 시인은 보지 못하고 너는 보는 가운데 두 사람의 운명은 교차한다. 보리차의 물방울이 날아가는 시간과 언 발의 물방울이 날아가는 시간이 교차하면서, 두 사람은 서로의 영혼이 아늑해지는 것을 느낀다. 시인은 “애인은 어떻게 영혼을 아늑하게 하는가”하고 말한다. 사람의 일상이 교차하면서 사람의 영혼이 아늑해지는 장면은, 시를 읽는 사람의 영혼 역시 그 밤으로 소환한다. 그 밤 안에서 애인의 언 발도 시인의 수면 양말 속 발가락도 따뜻하게 녹는다. 한 겨울밤은 꼭 아내의 마음 같다고 말하며, 그 신비롭고 따뜻한 밤을 시인이 연다. 

일러스트레이션 솜솜

시인이 우리 각자가 겨울을 견디며 가까스로 언 발을 녹이던 순간들을 모두 열면서, 모든 것이 얼어버리던 한 겨울밤은 신비롭고 따뜻한 밤으로 열리게 된다. 그곳엔 “발가락을 어루만지던 기분이 영원히 남아 있다.” 나와 너의 순간들로 존재하던 밤이, 우리의 영원으로 존재하는 밤이 되는 것이다. 물방울이 녹아 날아가는 자리 나와 너의 경계가 사라지는 자리에 우리의 영혼이 자리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우리의 삶에, 똑똑똑 하고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그러면 시인은, 우리는, 영혼을 맞이하고 영혼의 등에 우리의 얼굴을 쑥 집어넣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핀치의 여섯 번째 원고에서, 나는 시인 김현의 <미래가 온다>라는 시편을 소개한 바 있다. 그곳에서 나는 퀴어로서 살아가고 사랑하고 싸우고 쓰는 일에 대해 힘주어 이야기했다. 우리에게도 미래가 있을 수 있으니, 포기하지 말고 이곳에서 미래를 일구어나가자고. 원고 이후, 내게는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라는 질문이 남았다. 이는 당연히 평생 가지고 가야 할 질문, 나아간 답을 내놓기 위해 지속적으로 분투해야 할 질문일 것이다. 지난 원고에 이어 소개하는 시인 김현의 작품 <기화>는 ‘어떻게’에 대한 하나의 답을 준다. 그것은 바로 일상, 일상이다.

무너진 사람들에게 일상을 가꾸고 끌어나가자는 이야기는 너무 큰 욕심일 수도 있을 것 같아 조심스럽다. 그러나 일상은 다시 살아나가고 보다 잘 살기 위해서는 너무나 중요하다.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이번 겨울 나는 저녁마다 호수를 보러 공원에 갔다. 영원히 녹지 않을 것처럼 호수는 얼어 있었다. 그러나 매일 아침 깨어나 하루를 살아내고 매일 밤 호수를 찾아가자 호수는 결국 녹았다. 

지난밤에는 녹은 호수, 드디어 물처럼 움직이는 호수를 보았다. 아무도 없던 호수였는데, 사람들이 함께 모여 맥주도 마시고 따뜻한 얼굴로 웃고 떠들고 있었다. 엘라이자의 이야기를 보면서, 일상을 가꾸어 나가고 지속해나갈 수 있는 사람만이 스스로의 존재를 바로 세울 수 있음을 본다. 그리고 그런 사람만이 자신의 일상을 확장하고 공유하는 가운데 사랑을 이룰 수 있음을 본다. 또한 김현의 시를 보면서 생각한다. 각자가 최선을 다해 만들고 지켜나가는 현재는 우리 함께 교차하는 따뜻하고 신비로운 미래가 될 것임을. 오늘도 호수를 보러 나갈 것이다. 언젠가 눈 쌓인 공원을 산책하고 돌아온 영혼이 나의 문을 똑똑똑 두드릴 때, 활짝 열 수 있기 위하여. 발가벗은 마음을 이불 속에서 나누고, 너의 등으로 내 얼굴을 쑥 집어넣기 위하여, 그것이 내가 김현에게 얻은 ‘미래의 풍경’이다. 

신나리님의 글은 어땠나요?
1점2점3점4점5점
SERIES

다시 줍는 시

이 크리에이터의 콘텐츠

시에 관한 다른 콘텐츠

문학에 관한 다른 콘텐츠

콘텐츠 더 보기

더 보기

타래를 시작하세요

여자가 쓴다. 오직 여자만 쓴다. 오직 여성을 위한 글쓰기 플랫폼

타래 시작하기오늘 하루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