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발견 5. 릴리야 다 죽여

알다여성 주인공

애서발견 5. 릴리야 다 죽여

조은혜

일러스트레이터: 이민

<죽여 마땅한 사람들 / 피터 스완슨(노진선 역, 푸른숲)>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책을 읽으실 분들은 유의 바랍니다.

 * 피터 스완슨이 쓴 <죽여 마땅한 사람들(노진선 역, 푸른숲)>은 주인공 릴리가 사람들을 살해하는 이야기이다. 한 번 책을 펼치면 덮지 못 할 정도로 흥미진진한 서사 속에서 릴리는 냉정함과 이성을 유지하며 치밀하게 사람을 죽인다. 사이코패스 혹은 심판자의 모습을 한 릴리를 통해 서사 속 여성 캐릭터에 대해 이야기해봤다.

강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큰 일을 겪어도 초연하고 싶었다. 차갑게 생각하고 흔들림 없이 결단을 내리고 싶었다. 감성적이란 말보다는 이성적이란 말을 듣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보고 듣는 컨텐츠 속 여자들은 잘 울고, 잘 웃었다. 남자보다 약한 정신력을 가졌고, 더 감성적이었으며, 냉정하지 못 했다. 이런 모습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이런 특성들은 대부분 여성 캐릭터에게서만 볼 수 있었다. 이건 분명히 나쁜 일이었다.

시대가 변하긴 했다. <미스 슬로운>같은 영화가 나왔으니 말이다. <미스 슬로운>의 슬로운(제시카 차스테인 분)은 완벽히 나의 이상향이었다. 차가운 기운을 온 몸으로 내뿜고 어떤 상황이 닥치든 앞을 내다보고 최선의 결단을 내리는 사람이었다. 사랑과 일 앞에서 망설이지도,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오열하지도 않았다.

대부분의 서사가 마찬가지지만 특히 소설 속 여성 캐릭터들은 분노를 느끼거나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내면으로 침잠한다. 깊은 우울감에 빠지거나 혼자서 화를 감당하다 정신 이상이 된다. 추리나 스릴러 소설의 경우 여성이 주인공인 작품을 찾는 것이 힘들 정도이다. 다섯 번째 책으로 굳이 남자 작가인 피터 스완슨의 <죽여 마땅한 사람들>을 고른 건 이런 이유때문이다. 릴리는 남성 캐릭터의 전유물이었던 냉정함과 이성같은 특성으로 무장한 “흔히 볼 수 없는, 희대의 여성 사이코패스” 캐릭터다.

여성 사이코패스

릴리의 첫 살인은 열네 살 때였다. 엄마가 초대했던 “쳇”이라는 화가였다. 릴리는 아무 예술가나 마구 들이는 부모님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린 아이였기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쳇이 “소름끼치는 시선”으로 자신의 몸을 훑었을 때 “목구멍이 쓰릴 때까지 울었”을 뿐이다. 급기야 쳇은 릴리의 방에 들어와 릴리의 “가슴을 누”르며 자위를 했다. 릴리는 참지 않았다. 그를 유인해 말라버린 우물에 떨어뜨리고 우물 구멍을 막아버렸다. 그의 짐을 정리한 뒤 태연하게 “먹다 만 셰퍼드 파이”를 먹었다.

릴리의 두 번째 살인은 그의 첫 남자친구 “에릭 워시번”이었다. 릴리를 사랑한다던 에릭은 릴리에게 거짓말을 하며 전 여자친구인 “페이스”와 만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릴리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고 에릭의 승부욕과 견과류 알러지를 이용해 에릭을 죽이기로 한다. 에릭은 어리석었고 릴리의 계획은 치밀했다. 에릭은 사고사로 처리됐다. 릴리는 앞으로 더이상의 살인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릴리의 삶에 억만장자 “테드”가 등장한다. 자신에게 기분 나쁜 존재였던 페이스의 남편이기도 했다. 비행기 라운지에서 우연히 만난 둘은 비행기에서까지 이야기를 이어간다. 테드는 자신의 부인인 “미란다(페이스의 새로운 이름)”가 바람을 피고 있다며, 죽이고 싶다고 말한다. 릴리는 미란다를 모르는 척하며 그의 계획을 돕겠다고 한다. “사람은 누구나 죽”고, “어차피 죽을 사람 조금 일찍 죽이는 것 뿐”이라는 릴리의 말에 테드는 살인을 결심한다.

하지만 페이스 또한 만만한 인간은 아니었다. 테드 말대로 집 시공업자인 “브래드”와 바람을 피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를 사랑하는 건 아니었다. 테드의 재산을 갖기 위한 수단으로 브래드를 꼬신 거였다. 페이스는 브래드에게 강도로 위장해 테드를 죽이라는 바람을 넣는다. 페이스라는 매력적인 여자에게 눈이 먼 브래드 또한 테드를 죽이기로 마음 먹는다. 릴리와 테드 그리고 페이스와 브래드는 서로 한 팀이 되어 살인을 향해 달려간다.

릴리가 다시 한 번 강한 살의를 느낀 건 테드의 죽음 때문이었다. 테드는 살인 계획을 실행하기도 전에 죽음을 맞이한다. 릴리는 테드의 죽음이 페이스의 꼬임에 넘어간 브래드의 짓임을 알아채고 페이스와 브래드 모두를 죽이려 한다. 릴리는 브래드를 찾아가 페이스의 모든 말이 거짓임을 알려주고 너만 감옥을 가게 될 거라고 경고한다. 두려움을 느낀 브래드는 릴리의 말에 설득 당하고, 결국 자신의 손으로 페이스를 죽인다. 모든 일이 끝난 뒤 릴리는 브래드를 죽이고 완벽한 알리바이를 위해 부모님 집으로 향한다.

릴리는 본인이 한 모든 살인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단지 스스로를 “정상적인 인간이 아닌 동물, 소나 여우, 올빼미”처럼 “남과 다른 도덕성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살인을 했음에도 “마음이 느긋”한 걸 넘어 “기운이 넘쳤”고 “심지어 부모님과 함께 있는 것조차 즐거웠다”. 자신에게 상처 준 쳇, 에릭, 페이스 그리고 “무고한 사람을 죽”인 브래드를 살인으로 심판했지만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도 않았다. 살인자인 릴리에게 그들은 “죽여 마땅”한 사람들일 뿐이었다.

죽여지는 여성 말고 죽이는 여성

사이코패스 혹은 살인범을 소재로 한 이야기는 많다.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도 많다. 문제는 이들이 늘 주변부에 있다는 사실이다. 사이코패스처럼 괴물같은 캐릭터를 차지하는 건 늘 남성이다. 검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저음의 목소리로 사람들을 위협하거나 두려움에 떨게 한다. 여성 캐릭터는 그들을 무서워하며 울거나 죽임을 당하는 존재로만 등장한다. 영화화가 확정된 김영하 작가의 <살인자의 기억법>, 정유정 작가의 <7년의 밤>같은 작품들도 마찬가지이다. 죽이는 남자와 죽여지는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는 너무나 공고하다.

<죽여 마땅한 사람들>은 그 이분법적 구도를 철저하게 깨부순다. 성희롱과 성추행을 당한 릴리는 가해자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처벌했다. 사랑한다는 말로 자신을 농락하고 거짓말을 일삼으며 바람을 폈던 남자친구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자신에게 피해를 준 사람이라면 치밀하고 철저하게 계획을 짜 양심의 가책 없이 그들을 죽였다. 이성적이고 냉정한 판단 하에 자신의 고요한 인생을 위해 사람들을 죽이는 게 릴리였다. 릴리는 악인이 아니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누구라도 죽일 수 있는 인간의 탈을 쓴 동물이다.

괴물같은 캐릭터를 맡는 건 언제나 남성이고 여성은 늘 주변부에 머물며 그들을 두려워만 한다면, 서사를 소비하는 대중들 또한 그 역할을 당연시하게 될 수 밖에 없다. 많은 서사들이 너무나 차별적인 시선으로 여성 캐릭터를 그린다.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는 캐릭터조차 여성이 맡는 순간 수동적으로 변한다. 차갑고 무서운 성격, 무자비하게 사람을 죽이는 것은 남성만의 특성이 아니다. 성별을 떠나 인간이라면 모두가 “죽여 마땅한 사람” 하나쯤 마음 속에 담고 살기도 한다. 남성만이 특별히 살인에 능한 것이 아니다. 여성들도 충분히 악하고 냉정할 수 있다. 릴리처럼 다 죽이자는 게 아니다. 그게 옳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본인의 삶을 위해 타인을 죽이는 릴리같은 여성도 서사에 존재해야 한다는 거다.

내가 어렸을 때는 <미스 슬로운>의 슬로운처럼 차가운 여성도, <비밀은 없다>의 연홍처럼 광기로 가득 찬 여성도, <죽여 마땅한 사람들>의 릴리처럼 다 죽이는 여성도 없었다. 어린 나는 자연스레 차갑고 강인한 여성 대신 아름답고 친절한 여성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지금의 소녀들은 더 많은 여성들의 모습을 보고 자라야 한다. 릴리같은 강한 캐릭터들이 지겨울 정도로 많아야 상냥하고 감성적인 여성만이 여성의 모습이 아님을, 반드시 그런 여성이 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여성 캐릭터가 가야 할 길은 아직도 무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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