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줍는 시 2 - 아름다운 세탁소에 대한 상상력

생각하다

다시 줍는 시 2 - 아름다운 세탁소에 대한 상상력

신나리

일러스트레이션: 솜솜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맑은 술 한 병 사다 넣어주고

새장 속 까마귀처럼 울어대는 욕설을 피해 달아나면

혼자 두고 나간다고 이층 난간까지 기어와 몸 기대며 악을 쓰던 할머니에게

동네 친구, 그애의 손을 잡고 골목을 뛰어 달아날 때

바람 부는 날 골목 가득 옥상마다 푸른 기저귀를 내어말리듯

휘날리던 욕설을 퍼붓던 우리 할머니에게

멀리 뛰다 절대 뒤돌아보지 않아도

“이년아, 그년이 네 샛서방이냐”

깨진 금빛 호른처럼 날카롭게 울리던

그 거리에 내가 쥔 부드러운 손

“나는 정말 이애를 사랑하는지도 몰라”

프루스트 식으로 말해서 내 안의 남자를 깨워주신 불란서 회상문학의 거장 같은 우리 할머니에게

돈도 없고 요령도 없는 작곡가 지망생 청년과 결혼하겠다고

내 앞에서 울 적에 엄마 아버지보다 더 악쓰며 반대했던 나에게

“너는 이 세상 최고 속물이야, 그럴 거면서 중학교 때 『크리스마스 선물』은 왜 물려주었니?”

내가 읽다 던져둔 미국단편소설집을 너덜거리는 낱장으로 고이 간직했던 여동생에게

“나는 돼도, 너는 안돼”

하지 못한 말이 주황색 야구잠바 주머니 속에서 오래전 잘못 넣어둔 큰 옷핀처럼 검지손가락을 찔렀지

엄밀한 공(空)의 논리에 대해 의젓하게 박사논문까지 써 놓고

이제 와 기억하는 건

용수스님이 예로 드신 무명 옷감에 묻은 얼룩

그 얼룩은 무슨…… 덜룩

시인 김이듬이 말한 것처럼

그거 별 모양의 얼룩일라나, 오직 그 모양과 색이 궁금하신 모든 분들께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를 보여드립니다

십년 만에 집에 데려왔더니, 넌 아직도 자취생처럼 사는구나, 하며 비웃음인지 부러움인지 모를 미소를 짓던 첫사랑 남자친구에게

이 악의 없이도 나쁜 놈아, 넌 입매가 얌전한 여자랑 신도시 아파트 살면서

하긴, 내가 너의 그 멍청함을 사랑했었다 네 입술로 불어넣어 내 방에 흐르게 했던 바슐라르의 구름 같은 꿈들


여고 졸업하고 6개월간 9급 공무원 되어 다니던 행당동 달동네 동사무소

대단지 아파트로 변해버린 그 꼬불한 미로를 다시 찾아갈 수도 없지만,

세상의 모든 신들을 부르며 혼자 죽어갔을 야윈 골목, 거미들

“그거 안 그만뒀으면 벌써 네가 몇 호봉이냐” 아직도 뱃속에서 죽은 자식 나이 세듯

세어보시는 아버지, 얼마냐 좋으냐, 시인 선생 그 짓 그만하고 돈 벌어 우리도 분당 가면, 여전히 아이처럼 조르시는 나의 아버지에게


아름다운 세탁소를 보여드립니다

잔뜩 걸린 옷들 사이로 얼굴 파묻고 들어가면 신비의 아무 표정도 안 보이는

내 옷도 아니고 당신 옷도 아닌

이 고백들 어디에 걸치고 나갈 수도 없어 이곳에만 드높이 걸려 있을, 보여드립니다

위생학의 대가인 당신들이 손을 뻗어 사랑하는

나의 이 천부적인 더러움을


반듯이 다려놓을수록 자꾸만 살에 눌어붙은 뜨거운 다리미질

낡은 외상장부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미국단편집과 중론(中論), 오래된 참고문헌들과

물과 꿈 따위만 적혀 있다

여보세요, 옷들이여

맡기신 분들은 찾아 얼른 가세요. 양계장 암탉들이 샛노랗게 알을 피워대는 내 생애의 한여름에

다들, 표백제 냄새 풍기며 말라버린 천변 근처 개나리처럼 몰래 흰 꽃만 들고

몸만 들고 이사 가셨다

- 진은영,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훔쳐가는 노래』, 창비, 2012, 17-21쪽.

아름다운 세탁소에 대한 상상력

테이블은 다음과 같이 세팅되어 있다. 한 쪽에는 작은 불 위에 끓는 물 주전자. 다른 한 쪽에는 커다란 나무 판 위에 차 주전자 하나, 큰 잔 하나, 작은 잔 하나, 작은 찻잔 하나. 과정은 다음과 같다. 물이 끓으면 찻잎을 차 주전자에 쏟는다. 차 주전자에 물을 부은 후 뚜껑을 닫고 10초를 기다린다. 차 주전자의 차를 큰 컵에 붓는다. (차를 곧바로 찻잔에 따라낼 경우, 찻잔 마다 맛이 달라지기 때문에 차를 큰 잔에 부어 섞는 것이다.) 큰 컵의 차를 작은 잔에 따라 차의 향을 맡아본다. 작은 잔의 차를 작은 찻잔에 붓는다. 작은 잔, 이 빈 잔의 끝에 남은 차의 향기를 맡는다. 그리고 작은 찻잔에 담긴 차를 가만히 마신다. 차 주전자가 여섯 번 정도 움직이면 차 마시기가 끝난다.

어림잡아 3시간 정도 걸리는 것 같다. 가만히 앉아 순서에 맞추어 차를 마시는 일에 걸리는 시간 말이다.

역시 나는 차보다는 커피 쪽인 것 같아.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산장에서 가만히 차를 내려주는 친구를 보며 나는 말했다. 타이페이의 친구들은 주말 오후의 한 때를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며 보내는 일에 아주 익숙해보였다. 그들은 자주 싱긋거리며 웃고 별 것 아닌 이야기에 깔깔거리기도 했다. 나는 그들이 웃는 풍경,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렇게 긴 시간을 행복으로 채워 넣는 풍경을 구경하는 데 몰두하고 있었다. 그것이 내 삶과 너무나도 멀어서. 구경하면서 또 그들과 어울리면서 나는 그곳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오랜만에 굉장히 행복했다, 문제는 행복감과 동시에 당혹감이 밀려들어왔다는 것이다.

시간 쓰기 

음, 약간 체할 것 같았다. 하나는 낯선 시간 때문이었다. 언제 일어나지? 혼자 몰래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친구들은 시간에 대한 생각 자체를 애초에 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사람들과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는 데 너무나 익숙해보였다. 내가 이런 방식으로 시간을 써본 적이 있던가. 서울에서 나는 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어 쓰는 사람이었다. 아주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몹시 바쁜 것도 아니지만 항상 그랬다. 어느 날부턴가 아침 7시면 눈을 뜨고, 종일을 계획에 따라 움직였다. 사람들과 만나도 많은 시간을 쓰지 않았다. 점심, 저녁 때 만나 잠깐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고 헤어지는 것이 전부였다. 당연히 술자리는 잘 가지 않았다. 밤늦게까지 시간을 쓰면 다음날 움직이는 데 피로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득바득 시간을 확보했다. 그 시간들을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공부를 하거나, 글을 쓰거나, 산책을 하면서 썼다. 종일 정말 열심히 활동들을 하고 자기 전에 2시간 정도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며 시간을 보냈다. 잠깐 그 숨 쉬는 시간 동안에 여러 가지 생각들이 몰려들었다. 오늘 내가 잊고 하지 못한 일이 있나? 없나? 내일은 무엇을 해야 하지? 내일 그걸 잘 할 수 있을까? 이렇게 해볼까, 아니면 저렇게? 내일은 누군가에게 연락을 해야겠다. 누군가는 잘 지내고 있으려나? 일상을 잘 가꾸어 나가기 위한 한 편의 생각들. 그리고 또 한편에서는 이런 생각들이 드는 것이다. 내가 왜 이렇게 살지. 이렇게 사는 게 맞나. 다르게 살 수는 없을까. 너무 너무 힘들다. 누가 자꾸 뒤에서 밀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살다가 곧 죽어버릴 것 같다. 그러나 이 한편의 생각들은 심화되거나 끝맺어지지 못하고 항상 불이 꺼지고 말았다. 얼른 자야 내일 또 일어나 열심히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불안

잔다, 그러면 또 아침이다. 그리고 다시금 성실하고 빠릿하다고 포장하고 싶지만 그저 초조하고 조급하기 만한 나의 시간들이 시작된다. 나는 왜 이러고 사는 걸까. 불안. 불안하기 때문이다. 삶을 정말 사랑하거나 혹은 삶에 아주 뚜렷한 목표가 있어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서가 아니다. 실은 그 정반대에 있기 때문에. 삶에 별다른 애정이 없어 당장 그만둬도 딱히 아쉬운 마음이 들지 않아서 또한 삶에 별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 어떤 노력도 하고 싶지 않다고 느끼는 순간이 허다하기 때문에. 그렇다면 나는 왜 내 삶을 있는 그대로 놓아두고 비워두지 못 하는 것일까. 왜 불안감을 느끼는가. 그건 내 삶의 무의미가 곧 내 존재의 무의미를 증명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누군가의 노랫말처럼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도 아니게 되니까. 나는 아무도 아니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두려움으로부터 불안감을 느끼고 이를 동력으로 미친 듯이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다.

그러면 이 불안감이 내 삶의 긍정적인 동력이 되고 있다고 생각해볼 수 없을까? 안타깝게도 아닌 것 같다. 이 불안감은 정도를 넘어섰다. 어느 정도의 불안은 삶의 긴장감과 동력으로 자리할 수 있겠지만, 나의 불안은 내 존재와 삶 자체를 잠식해가고 있는 것 같다. 불안은 내가 스스로의 존재와 삶이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하게 만든다. 불안은 뭐 좀 무의미해도 괜찮아, 다 그런데 그냥 살아있는 거, 할 수 있는 만큼 열심히 살아가는 거 아니겠어? 하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보다 불안은 존재 증명과 인정 욕망을 추동한다. 덕분에 나는 매일 발등에 촛농이 뚝뚝 떨어지는 기분을 느끼며 산다. 그리고 이렇게 발버둥치는 방식으로 지속되는 삶은 나를 자꾸 바깥으로, 바깥으로 민다.

일러스트레이션 솜솜

또 불안은 내게 상상력을 앗아간다. 불안 안에서 나는 너무나 절박한 방식 말고 다른 방식의 삶이 가능할 수 있다는 상상력을 잃는다. 불안은 당장 움직이지 않으면 모든 것이 끝장날 것처럼 굴기 때문에, 불안한 삶 안에서 나는 생각과 상상력을 펼쳐 볼 시간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안은 결국 불안한 삶에 우리를 매몰 시킨다. 타이페이에서 그곳의 친구들이 차를 마시며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며, 그리고 같이 웃고 있지만 실은 너무나 초조하고 조급했던 내 안의 시간을 마음을 느끼며, 나는 좀 부끄럽고 많이 속상했던 것 같다.

그 자리에서 고작 차 한 잔을 마시는 데 체할 것 같았던 또 하나의 이유는 낯선 행복감 때문이었다. 그 날은 너무 오랫동안 행복했고 그것은 마치 처음처럼 낯설었다. 아참, 행복이 찰나의 기분으로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상태로 남아있을 수도 있었지. 오랜 시간 불안 안에서 살아오면서 아마 행복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힘을 많이 잃어버렸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에 대해 생각하면 나는 정말 할 말이 없었다. 삶에서 행복을 중요하게 여기고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행복에 부딪칠 때면 그저 난감해하고 조금 웃고 그러다가 잊어버리는 시간들을 지나오기만 했던 것이다. 어쩌면 행복에 관한 태도도 훈련이 필요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불안에서 조금 비껴서서, 행복을 느끼고 행복에 대해 생각하는 훈련. 행복을 찰나의 기분으로 느끼고 망각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고 따뜻한 순간을 소중하게 여기고 마음에 두고 그것으로 삶을 데우고 삶을 끌어나가는 것.

어떻게 하면 나를 계속 살게 할 수 있을까

스스로가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는 두려움과 그로 비롯된 불안감으로 인해 힘들 때마다 꺼내어 읽는 시가 있다. 나에게 2012년은 참 다사다난했는데, 그 해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어떤 사랑을 시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해에는 진은영의 『훔쳐가는 노래』라는 시집이 출간되기도 했다. 내가 함께 시를 배우던 사람과 내가 사랑하던 사람이 똑같이 진은영의 『훔쳐가는 노래』라는 시집을 선물로 주었다. 함께 시를 배우던 사람은 시집을 선물하며 이렇게 말했다. “제가 중국에서 유학할 때, 너무 너무 힘들었거든요. 진은영의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라는 시를 인쇄해서 책상 위에 붙여 놓구, 그걸 매일 아침마다 소리 내어 읽었어요. 그렇게 계속 살 수가 있었어요.”

나를 살게 하는 게 뭘까. 어떻게 하면 나를 계속 살게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언제나 이 질문으로부터 시작하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삶을 지속해나가는 것 같다. 진은영의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는 이 질문을 품고 삶을 지속해 나가며 어떤 아름다운 역사를 갖게 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야기 속의 그는 사랑, 슬픔 어쩌면 욕망, 어리석음 등에 대해 솔직하고 덤덤하다. 그리고 그가 가진 것들이 아름다운 세탁소의 얼룩과 덜룩이 된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조금 덜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며, 조금은 있는 그대로 살아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다. 조금은 마음을 놓고 살아도 아름다운 세탁소의 역사를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어떤 바람을 우리에게 불어넣어주는 것 같다. 살아볼 만하다고, 아름다울 수 있다고, 조금 더 해보자고.

따뜻한 차 한 잔의 시간과 웃고 떠드는 행복감. 그리고 아름다운 세탁소에 대한 상상력이 우리가 질문을 품고 삶을 지속해 나가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이 시를 골랐다. 아름다운 세탁소에 대한 상상력이, 그 바람이, 당신과 나의 삶을 밀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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