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줍는 시 23. 나를 좀 이 노래에서 벗겨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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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줍는 시 23. 나를 좀 이 노래에서 벗겨줘

신나리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예전부터 엄마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하나의 이미지가 있다. 내가 바라본 엄마는 부엌에 서 있다가, 거실에 앉아 빨래를 개다가, 침대에 우두커니 앉아서, 이렇게 혼잣말을 하곤 했다. “사는 게 지긋지긋하다.” 늘 바쁘고 피로하면서도 동시에 늘 삶에 대한 권태감을 느끼는 사람. 어른이 되어보니 사는 게 지긋지긋하다는 말이 어떤 뜻인지 알 것 같다. 삶을 이루는 모든 의미들이, 또 나를 이루는 모든 의미들이 참 지긋지긋하게 느껴질 때가 있기에. 내 삶이 어떠한 의미와 가치를 갖는지, 나는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가진 사람인지 그만 생각하고 증명하고 싶을 때가 있기에. 그렇게 의미와 가치로 일구어진 세계에 질식해버릴 것 같을 때, 나는 시인 신해욱의 시집을 읽는다.

시인 신해욱은 ‘의미’가 이 세계를 더럽히고 인간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고 보는 것 같다. 그는 의미 과잉으로 고통받아 죽어가는 존재들을 가만히 관찰하고, 결국 죽어버린 존재들이 유령 혹은 그림자로 떠다니는 세계를 상상하고 그려낸다. 그의 목적은 의미가 최소화된 언어들을 간결하게 배치하는 방식으로 하나의 세계를 건설해내는 것이다. 머리를 가볍게, 마음은 내려놓고, 시집을 들어 언어들을 따라가보자. 그리고 신해욱이 건설해 놓은 세계를 내 마음대로 상상해보자. 이 글은 신해욱의 세계를 읽어낸 하나의 예시일 뿐이다.

내가 읽은 신해욱

그의 첫 번째 시집 『간결한 배치』는 각각의 챕터들로 하나의 세계를 구현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고통받아 미약해지거나 죽임을 당해 시체가 되어버린 존재들과 ‘오래된 휴일’을 보내고, ‘모텔 첼로’의 어두운 객실에서 당신의 오래된 죽음을 바라볼 것이며, 의미를 잃어 투명해진 존재들이 늘어져 있는 ‘환한 마을’로 입장하여, 전체를 잃고 부분만이 남아 존재하는 것들의 ‘즐거운 번화가’를 걸어볼 것이다. 또한 환한 마을을 걸어 나가서, 우리는 오직 녹거나 사라지는 방식으로만 삶을 지속하는 존재들의 ‘흑백의 마을’을 구경하고, 언젠가 존재했던 ‘의미’의 세계를 되새김질하는 ‘사각지대’를 지나게 될 것이다.

‘오래된 휴일’을 열면 물밑에 누워 가만히 부패해가는 오래된 익사체를 만날 수 있다. 이미 죽은 지 꽤 오래된 익사체는 끊임없이 밀려 들어오는 바람, 햇빛, 물비늘로 인하여 하염없이 더욱이 죽음을 맞이한다. 형체를 잃고 사라져간다. “그를 지우는 물비늘들 사이로/햇빛은 벌레처럼 고여 들고/물속에 가라앉은 낱낱의 살갗을 쓸어/바람은 물밑에서 다시 물밑으로 불고”(「오래된 익사체」) 타인의 죽음을 가만히 관찰하다가 ‘모텔 첼로’로 들어서면 그곳에는 ‘나’의 죽음이 있다. 밀실에서 얼굴 위에 마른 흙이 한 삽 쏟아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죽어간다. 내 안으로 눈물이 스며든다. “얼굴 위로/마른 흙이 한 삽 쏟아진다. 아니/환한 그늘일까./얇아서 재빨리 분해되는/어쩌면 홑이불일지도./그렇지만 나를 감싸는 건/다른 것./눈물이 안쪽으로 쏟아진다./여기엔 빈틈이 없는데./어떻게 차가운 것이.”(「밀실」)

죽어버린,
사라져버릴,
잃어버린 존재들

‘환한 마을’에는 나처럼 죽어버린 존재들이 가득하다. 무엇인가 나의 어깨를 치고 지나가고, 내 그림자가 나보다 먼저 움직이기 시작하는 일이 일어난다. 그로부터 나는 스스로가 그림자보다 희박하고 가늘어져 버렸음을 알게 된다. “무엇인가 어깨를 치고 간다./그림자는 나보다 조금씩/먼저 움직이기 시작한다.”(「한 사람1」) 그리고 맑고도 무거운 어떤 날, 그가 쓱 웃으며 나의 어깨를 치고 지나간다. 어깨가 지워지고, 나의 의미가 지워진다. “내가 먼저 움직이고 싶었지만/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어/쓱 웃으며 나를/나의 의미를 미리 지워버렸다.”(「느린 여름」) ‘환한 마을’의 ‘즐거운 번화가’에는 빨간 모자, 분홍신, 가부키 같은 것들이 살고 있다. 나는 머리를 잃어버린 모자와 다리를 잃어버린 신발 그리고 얼굴을 잃어버린 화장을 바라보며 자신을 잃어버린다는 것이 뭘까 생각해본다.

‘흑백의 마을’에는 아주 잠깐만 존재하고 곧 조용히 사라져버리는 존재들이 살고 있다. 내 얼굴에 사선의 흉터를 남기고 사라진,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운의 검객. “여기엔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운이./나로 말하면/가볍고 빠르며 검은 사람이라 불린다.”(「검객」) 나의 얼굴을 발톱으로 가르고 사라져버린, 검은 사람의 어깨 위에 검은 고양이. ”검은 사람의 어깨 위엔 검은 고양이./어떤 빛이 있어/살갗이 가볍게 쓸릴 때/발톱으로 얼굴을 가르고/그 사이로 고양이는 사라진다.”(「검은 고양이」) 나를 통과하는 순간 수직으로 일어나 나를 지워버리는, 그림자. ”그림자는 드리워진 채로/당신이 통과하는 순간에만 수직으로 일어나/당신을 지운다./힘을 다해 묻거나/무겁게 누르는 대신/지나가는 당신의 한 단락을/아주 잠깐씩만 점유할 뿐이다.”(「잠식」) 그리고 조금씩 내려앉고 가만히 사라져가는 하얀사람. “*Where goes the white melts the snow?”(「하얀사람」)

또한 ‘사각지대’에서는 그간 죽고, 희박해지고, 잃어버리고, 사라져버렸던 존재들이 복원되고 있다. 존재들이 복원된다는 것은 그들의 웃음과 노래와 의미들이 복원된다는 것이다. “갈라진 웃음들이/갈라진 노래들이/갈라진 의미들이/나를 긋고/나를 복원하고 있었다.”(「반향」) 그러나 나는 삶의 웃음과 노래와 의미들이 복원되는 일이 달갑지 않다. 나는 해묵은 이야기를 모두 뱉어 버리고 다시 가벼워지고 사라져버리고 싶기만 하다. “해묵은 이야기를 한꺼번에 뱉어/목을 놓아버리고/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었다.”(「반향」)

너는 내 편일테니

어째서 시인은 이토록 의미에 덧씌워지는 일에 고통받았으며, 의미로부터 벗어나 한없이 사라져버리고 싶었을까. 왜 시인에게는 삶보다 죽음이 가깝게 느껴졌고, 의미보다 무의미가 매혹적으로 느껴졌을까. 어떤 의미와 노래와 웃음들이 시인이 간결한 배치로만 이루어진 세계를 구상하도록 만들었을까. 작품 「모르는 노래」에서 우리는 그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다. 작품 속 화자는 누군가를 불러 세워 귀를 빌려 달라고 요청한다. “어이 귀를 좀 빌려줘.” 화자는 알 수 없는 노래가 자신의 입 안에 가득 고여 너무나 고통스럽다고 호소한다. 이 노래는 화자를 있는 그대로 존재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화자를 지우고 흉내내고 덮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를 지우고/나를 흉내 내는/무서운 선율.”

삶의 의미와 존재의 의미에 짓눌려 제대로 숨 쉴 수 없는 날들이 있다. 타인이 나를 호명하거나 판단하거나 평가하는 언어에 짓눌릴 때도 있고, 가끔은 내가 나를 호명하고 판단하고 평가하는 언어에 짓눌리기도 한다. 시인이 아무나 불러 세워 호소하였듯, 그럴 때면 나는 신해욱의 시집을 열고 그곳으로 들어간다. 막대한 무의미의 세계의 사라져가는 존재들 사이로 걸어 들어가면서 시인에게 말해본다. “필시 너는 내 편일테니/나를 좀/이 노래에서 벗겨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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