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줍는 시 9. 그녀(들)의 가능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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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줍는 시 9. 그녀(들)의 가능세계

신나리

일러스트레이션: 솜솜

아주 어릴 적, 그러니까 지금은 기억에 없는 어떤 시절에 나는 누런 소파에 누워 젖병을 물고 있었다. 그곳은 한가로운 공기가 오가던 꽃집이었다. 어쩌다 바닥으로 굴러떨어지기도 했는데 아가인데도 울지 않고 가만히 엎어져 있어 신기했다고 한다.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되는대로 귀를 뚫어버리던 시절에 나는 누런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밀크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곳은 전화벨 소리가 바쁘게 울리던 꽃집이었다. “도대체 왜 꽃을 사는 거야? 허영과 사치를 선물하는 거야?” 엄마는 손사래를 치며 집에나 가라고 말했다.

꽃을 좋아하는 일

엄마 덕분에 나는 오랜 시간 꽃에 둘러싸여 살았다. 사람들은 나를 꽃집 딸이라고 부르며 나의 삶이 꽃으로 인해 얼마나 아름답고 풍요로울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이 울고 웃으며 꽃을 주고받는 행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또 스승의 날마다 엄마가 교무실로 큰 꽃바구니를 보내는 게 어찌나 싫던지. 한 번은 엄마 가게에 처들어가 큰 소리로 “엄마는 완전히 속물이야.” 하고 말한 적도 있다. 그 멍청하고 신나던 시절이 지나가고. 대학에 진학한 나는 엄마로부터 꽃으로부터 그리고 꽃집 딸로부터 멀리 멀리 도망쳤다.

대학에 가서는 친구와 연인을 사귀었는데, 놀랍게도 그들은 모두 내게 꽃을 좋아한다고 이야기했다. 꽃은 정말 아름답다고, 너무 아름다워서 집에 돌아오는 길이면 트럭에 들러 꼭 한 다발씩 사온다고. 그래? 꽃이 아름다운가? 내게 꽃은 언제나 돈이고 생계였는데.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느끼며 너무나 좋아한다고 말하는 꽃.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나도 꽃을 아름답다고 느끼며 좋아하기 시작했다. 남들과 다르게 내게 꽃이 아름답고 좋다는 것은 너무나 새로운 감각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엄마 가게에 찾아가 누런 소파에 앉았다. 둘러보니 그곳은 아름다움 천지였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내게 아름다움이란 어떤 체험을 통해 새로운 감각이 깨어나는 일, 그 일로부터의 환희다.

새로운 감각이 깨어나는 일

얼마 전 우연한 계기로 <Piano Day Seoul> 공연에 다녀왔다. 피아노 데이란 독일 뮤지션 닐스 프람이 시작한 것으로, 피아노를 연주하고 듣는 즐거움을 나누는 참여형 플랫폼 공연이라고 한다.나는 음악에 대해 잘 모르고 음악을 잘 듣지도 않는다. 또 음악 공연의 경험은 좋아하는 뮤지션의 단독 공연 몇 번이 전부다. 그런 내게 피아노로만 이루어진 공연이라니.

원래 연습실로 쓰였다는 공연장에는 아름다운 갈색 피아노 한 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천장에는 둥근 조명 하나가 내려와 있었고, 피아노 주변으로 마이크들이 작게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바닥 한 켠에 초 하나가 켜져 있었다. 피아노는 둥글고 부드러운 느낌부터 시작하여 아주 다양한 느낌의 소리를 냈다. 그것은 어린이 시절에 피아노 학원에서 딸깍거리는 메트로놈 소리와 함께 지겹게 들었던 피아노 소리와는 아주 달랐다.

연주자들은 기존에 알려진 곡들을 연주하기도 하고 자작곡을 연주하기도 했다. 듀엣 연주로 시작한 공연은, 네 명의 연주자가 각각 준비한 곡들을 연주하며 진행되었다. 놀랍게도 누가 연주하냐에 따라서 피아노는 전혀 다른 소리를 냈고 다른 음악을 들려주었다.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공연은 연주자 11과 이상욱의 공연이었다. 주로 피아노는 클래식 곡들을 연주하는 데 쓰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연주자들이 피아노로 지금의 어떤 절망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은 내게 충격적이었다. 두 사람의 곡에는 뚜렷하게 지금 이곳의 어떤 절망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곡들은 슬프고 아름답고 허무한 느낌을 담고 있었다. 

특히 연주자 이상욱의 마지막 곡은(자작곡) 왈츠였는데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느낌이 남아 신기했다. 두 사람의 공연은 피아노를 연주하는 두 사람의 존재 자체를 명확하게 담아내다가도, 피아노만 남고 두 사람의 존재를 홀연히 가려버리기도 했다. 피아노 소리만 남은 공간은 나와 같은 관객이 오고 갈 수 있는 빈 통로가 되었다. 두 사람의 피아노 연주는 절망, 슬픔, 허무, 신비가 있었기에 나와 가깝고 대화하는 느낌이 들었고 그러다가도 가만히 빈 통로 같았기에 나는 피아노 소리만을 느끼며 그 빈 통로를 내 것으로 만드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아름다움의 체험이었다. 나를 새로운 감각으로 이끄는 체험, 그리고 환희.

한 편의 시가 주는 환희

한 다발의 꽃이 주는 환희, 하나의 피아노 연주가 주는 환희, 그리고 여기 한 편의 시가 주는 환희가 있다. 앞선 <다시 줍는 시> 편에서 우리는 임솔아 작가의 고통의 언어들과 마주한 바 있다. 그녀는 고통을 예민하게 감각하고 표현하며 고통에 대해 지속적으로 말하는 작업을 행하였다. 그녀의 작업은 고통에 ‘함께’ 문제 제기하고 고통을 ‘함께’ 벗어나는 상상에까지 나아간다는 데 의미가 있었다.

이번 편에서 소개하고 싶은 시인 백은선 역시 고통과 절망을 말하는 작가다. 흥미로운 점은 그의 고통과 절망에 대한 말하기는 특별한 아름다움의 체험을 구성해내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절망 사이를 달리는 일

시집 『가능세계』에서 백은선은 달려나가는 시 언어를 통해 우리를 새로운 감각의 세계로 이끈다. 시편 <가능세계>는 “이게 끝이면 좋겠다 끝장났으면 좋겠다”라는 문장으로 열리며, 문장에 담겨 있는 정신은 이 길고 긴 시의 마지막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시편에서 시인은 끝장났으면 좋겠는 이유나 목적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저 끝장나보기 위해 계속 달린다. “왜냐고? 끝장나라고/됐어 다 필요 없어/말로 할 수 없는 말이/말뿐인 말로/앞발이 잘린 채 뒤틀릴 때/온도와 함께 혓바닥을 잃을 때” 시인은 극단적인 느낌의 언어들을 적극적으로 선택하고 배열하는 작업을 통하여, 이 시대의 어떤 절망을 정확하게 담아내는 동시에 절망 사이를 달리는 일을 행한다. 우리는 그가 건네준 두 다리로 절망 사이를 달리는 일을 통하여, 아슬아슬한 곡예의 스릴과 시원하게 가슴이 열리는 기쁨을 맛볼 수 있게 된다. 

일러스트레이션 솜솜

백은선은 구체적으로 고통과 절망의 장면을 펼쳐 보이는 데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보다 그녀는 고통과 절망을 말하고 그 말 사이를 달리고, 달리다 넘어지고 폭주하는 그 감각 자체를 드러내는 데 집중하고 있는 것 같다. 또 그녀의 언어들은 때때로 자학과 파괴로까지 나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킥 드럼이 부서질 때까지 달리는 숲/오해받고 싶다 하염없이 넘어지고 싶다”, “이미 실패했지만 다시 실패하고 싶다” 재미있는 지점은 우리가 그녀의 장시를 빠른 속도로 따라가며 읽을 때 우리는 임솔아의 고통에 공명했듯 백은선의 고통에 역시 공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백은선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도대체 그녀가 이러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 질문들은 모두 잊자. 그렇게 잊고 그저 함께 달리자. 우리는 그녀의 가능세계 안에서 함께 달리며 고통과 절망을 아름다움과 환희로 전복시킬 수 있다. 그러다 또 완전히 뒤집혀 실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마 다시금 일어나 달리고 또 달리게 될 것이다. 아주 아름답게, 끝장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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