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하는 여자 2. 페미니즘으로 안정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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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하는 여자 2. 페미니즘으로 안정을 찾다

효규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동시에 찾아온 안정과 불안정

퇴사를 한다는 것은 더이상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처음엔 보기 싫은 얼굴 안 봐도 되고, 시간을 마음껏 쓸 수 있어 정말 좋았다. 그런데 곧 외로움이 들이닥쳤다. 집에서 아무것도 할 게 없었다. 나를 맞이한 것은 집안일이나 요리는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부채감이었다. 그런데 이건 또 하기 싫었다.

산부인과에 가는 일정 말고 딱히 할 게 없었다. 나와 비슷한 연령대의 주변인들 중에서 일을 쉬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왠지 이 몸을 하고서 고향에 내려가는 것도 싫었다. 친정에서도 임신으로 급히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주변에 건네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 무슨 배짱으로 내가 친정에 내려가겠는가. 그래서 나에겐 도망가 숨을 곳조차 없었다.

어차피 집에서 가사노동 외에는 아무것도 할 게 없으니, 코딩과 중국어나 배워볼까 하면서 끄적끄적 거려보기도 했다.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다 갑자기 우울이 찾아와 불 꺼진 집에서 이불을 덮고 가만히 누워있다가 엉엉 울었다.

메르스가 돌았다

하필 그 때 한국에 메르스가 돌았다. 임산부였던 나는 가뜩이나 외출을 못 하는데, 더더욱 외출을 삼가야 했다. 산부인과 말고는 외출할 수가 없었다. 밖으로 나가는 길조차 고역이었다. 더운 여름에 감염을 피하려고 마스크를 쓰고 다녔는데, 임산부는 아이를 품고 있어 이미 정상인들보다 체온이 높다. 원래 몸이 찼던 나는 처음으로 내 몸에서 돋아나는 땀띠에 돌아가시기 일보 직전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에어컨 아래에서 적당히 시원한 물을 마시며 땀띠에 약이나 바르고 임신으로 인해 부풀어 터지려는 배에 의미 없는 크림을 바르며 하염없이 스마트폰이나 만지는 것이었다. ‘메갈리아’, 그리고 ‘페미니즘’을 그때 만났다. 하필 내가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땀띠까지 겪어야 했던 문제의 ‘메르스’를 다루는 갤러리(게시판)에서 시작된 그 불길 말이다.

‘페미니즘’이란 단어를 들어본 적은 있었다. 그런데 그게 뭔지조차 잘 몰랐다. 그냥 여성인권을 위한 개념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 삶에는 굳이 ‘인권’ 개념으로 끌고갈만한 ‘모욕’은 여지껏 없었다고 생각했다. 곰곰이 따져보면 몇가지 있기는 했지만 늘 그 경계선을 요동만 치지 넘치는 일은 없었다고 생각했다. 앞에서 이야기한 그 수많은 일들을 회사에서 겪고서도 나는 여성인권 문제와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여자답지 않아서 좋다’는 회사에서 열심히 일했던 사람 아니던가.

‘미러링’이라 불리우는 게 엄청난 파급력을 가져오며 몇 페이스북 페이지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메갈리아3’ 페이스북 페이지가 통으로 삭제되어 시끄러워진 광경도 보았고, ‘메갈리아4’ 페이지와 ‘김치녀’ 페이지와 한 판 붙는 것을 구경하기도 했다. 콘텐츠들은 끊임없이 캡쳐되고 복사되어 여기저기 떠돌아다녔다. 누군가는 통쾌하다고 했고, 누군가는 불쾌하다고 했다. 집에 갇혀있던 나는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면서 작은 화면 속에서 이 모든 일을 지켜보았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는데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그때부터 페미니즘 서적을 사다 읽기 시작했다. 페미니즘 이슈들을 찾아보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내 삶에 모욕은 없었다는 생각이 조금씩 부서졌다. 지금까지 내가 내 삶의 수면 아래로 꾹 눌러왔던 찜찜함이 모두 여기에 얽혀 있는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임신 직후 겪었던 괴로움, 결혼 생활의 어려움, 시댁과의 갈등, 친정에서 받아온 성차별적인 교육들… 이 모든 어려움에 그동안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나는 몰랐다. ‘여자의 일’을 여자가 이야기하는 것은 하찮고 나약한 일이라고 생각해 왔다. 회사를 상대로 한 고소를 쉽게 포기했던 것 역시 돌이켜보면 그런 연유도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임신했던 나에게 모욕을 주었던 이들에게 웃으면서 화답한 것도 다 그래서였다. ‘이깟 일로 화내는 쿨하지 못한 나’는 매우 여자다운 것이고 그러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자답지 않게, 여자같지 않게 굴고자 했다. 임신은 너무나도 여자만 할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랬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페미니즘으로 무너져내렸다.

내가 힘들어했던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난 다음부터 순식간에 안정감이 찾아왔다. 남들은 다 애 낳고 직장 잃고서도 잘만 사는데, 나만 사회부적응자 마냥 힘들어 하는 줄 알았다. 내가 힘든 게 이상한 줄로만 알았다. 스스로의 의지로 부적응이나 우울한 감정을 씩씩하게 극복해야하는 줄로만 생각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바로 ‘내 인생 각성!’ 하고 외칠 일이 일어난 건 아니었다. 다음에 이야기하겠지만 도리어 겹겹이 쌓여있던 내 안의 여성혐오를 마주하고 끊임없이 부수어야 했던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쨌든, 페미니즘은 내가 나 스스로를 학대하는 것을 멈출 수 있게 해준 힘이었다. 이는 회사도, 남편도, 친정도, 시댁도, 어느 누구도 해주지 않았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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