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스튜핏-워너비

일러스트레이션: 솜솜

대세

대세란 것이 그렇다. 싫어도, 관심 없어도, 내 수비범위가 아니어도 눈에 띄는 것. 도저히 알아채지 않을 수 없는 것. 이를테면 국민 프로듀서 열풍을 일으킨 <프로듀스 101>이 그랬고,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전국민이 일손을 놓고 결승전 문자투표에 열을 올렸던 <슈퍼스타 K2>가 그랬고, 노래로 따지자면 <글리>까지 등장하는 데 성공한 '강남스타일'이 그랬다. 물론 특정한 창작물에만 대세가 있는 것은 아니다. 말에도 대세가 있다. 흔히 말하는 유행어들. 딱 1년만, 아니, 반년만 지나도 순식간에 어색해지는 것들 말이다. 지금 이 유행어의 절정을 달리고 있는 문구를 몇 개 뽑으라면, 그 중에서도 '스튜핏/그레잇'은 꽤 손쉽게 꼽힐 테다.

많이 들어본 이야기

<김생민의 영수증>에서 등장한 '스튜핏'은 프로그램에 등장한 인물들의 소비내역을 분석하는 김생민이 좋지 못한 소비습관을 발견했을 때 외치는 말이다. 반대로 좋은 소비라고 여겨지는 것에 그는 '그레잇'을 외치고. 소비 습관을 분석하는 주체가 김생민이라는 데에서부터 이 개념이 판단하는 좋고 나쁨은 상당히 자의적인데, 단지 그것이 자의적이기만 했다면 모두가 비슷한 개념을 전유하는 유행어가 될 수 없었을 테다. 그가 판단하는 스튜핏/그레잇은 그의 남성성을 대변하며, 한국 사회의 전형적인 '아끼고 절약하며 경제를 살리고자 하는 성실한' 중년을 대변한다. 그러니 그 분류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그가 말하는 스튜핏과 그레잇이 어떤 것인지는 한국에 사는 모두가 쉽게 분류가 가능하다. 어딘가에서 많이 들어본 얘기거든. 아빠로부터, 선생님으로부터, 재태크에 성공했다는 검소한 직장 선배로부터, 30살에 자기 명의의 집 마련에 성공했다는 동기로부터.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쉽게 예측해 보는 스튜핏 리스트>

- 갑작스러운 해외여행의 결심으로 인한 비행기값과 숙박비

- 홧김에 시켜먹은 치킨들

- 모바일 게임 과금 (스타터 패키지가 구성이 참 좋았다니까요)

<쉽게 예측해 보는 그레잇 리스트>

- 장기간의 정기 적금 (주택청약용이면 슈퍼 그레잇)

- 생필품 정기배송

- 국민연금

김생민이 제시하는 이 스튜핏과 그레잇의 어떤 명확한 표상은 특정한 삶의 방식을 요구한다. 충동적인 소비는 줄이고, 동일한 재화라면 최대한 싸게 살 수 있는 기회만 노리고, 사치스러운 식사 한 끼 하는 대신 그 돈으로 여러 끼의 가성비가 좋은 식사를 하는 것과 같은. 검소하고 예상가능한 소비를 바탕으로 미래를 계획하는 인간형. 서구권에서는 한참이나 쓰여 이제 유행어는 커녕 구시대의 말이 되어버린 욜로(YOLO)가 얼마전에 한국에 본격적으로 수입되어 욜로하는 이들을 일컫는 말인 '욜로족'까지 미디어에서 통용되기 시작했는데, 이 욜로족은 김생민의 숙적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스튜핏의 역설

하지만 나는 그가 제시한 스튜핏/그레잇의 구분이 무척 빈곤해진 한국 사회를 대변한다는 점에서 안타까울 뿐만 아니라, 그레잇하기 힘든 시대를 사는 이들을 정면으로 무시한다는 점에서 무척 안이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내가 스튜핏하게 살기의 선봉과도 같은 소비-인생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련의 자기방어이자 변명일 수도 있으나, 꽤 유효한 변명이라고 느낀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돈이면 다 되는'가? 애석하게도, 혹은 애석하지 않게도 그렇다. 우리는 돈이면 거진 모든 것을 살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비단 그것이 특정하게 값이 매겨진 상품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돈으로는 여유도 살 수 있고 시간도 살 수 있고 관계도 살 수 있다. 그런 것을 사지 않는 비용? 전부 스스로를 쥐어짜내서 감당하는 것이다. 결국 개인이 사회에 지불하는 비용은 비슷하다. 그것이 명목적인 소비로 나타나느냐, 혹은 비가시적인 개인의 소모로 치환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그리고 나는 개인의 소진을 막기 위해 기꺼이 웃돈을 지불할 의사가 있는 어른일 뿐이고 말이다. 

가성비 좋은 맛집을 시도하고 몇 시간 동안 기다린 후 제휴 할인을 챙길 에너지를 소모하는 대신에, 한 끼에 들이는 예산을 높여 좋은 식당에 코스 요리를 예약하고 싶다. 한인민박을 예약하고 공동 객실에서 자면서 타인과 부대낄 에너지를 소모하는 대신에,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으며 룸서비스가 가능한 호텔에서 묵고 싶다. 추위에 웅크리며 밖을 겁내 몇 겹을 껴입고서야 나가는 대신에, 가볍고 따뜻한 겉옷을 사서 입고 싶다. 나는 그러한 선택을 하고자 하고 그것에 따른 비용을 기꺼이 지불하며, 이것 역시 자본주의 사회에서 (본래는 기꺼이) 허용되는 삶의 형태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선택이 '스튜핏'으로 묶여 좋지 못한 선택으로 격하되는 것은, 시대정신이 취향과 여유를 긴축해버린 삶을 요구한다는 뜻이다. 

그레잇하기 불가능한 시대에게

그러한 삶의 습관과 관점이 '스튜핏'한 '욜로'로 요약되어 지탄받아 마땅한 대상으로 떠오른 이유는 여유있는 선택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점점 줄어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물가상승률은 전년 대비 두 배 빠르게 올랐지만, 가처분소득 증가율은 꾸준히 제자리였다. 특히 30세 미만 청년 가구의 가처분소득은 감소하고 있다.1) 미래를 위한 장기적 투자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주식과 펀드는 대부분의 개미투자자를 외면하는 결과를 내놓으며, 은행에서 가입할 수 있는 적금의 우대금리는 잘 받으면 3프로. 천만원을 쓰지 않고 1년 버티면 30만원(에서 세금이 떨어진 그것보다 조금 적은 돈)을 버는 셈이다. 

그러느니 지금 쓴다. 그게 '욜로'로 요약되는 타입의 인간들이 내린 결론이다. 우리는 여유를 강박적으로 줄여야 하는 시대를 버티고 있으니까. 불안정한 미래 대신 현재의 여유와 즐거움을 택하겠다는 결정이 스튜핏으로 불리는 게 정당한가? 그래서 이 그레잇과 스튜핏의 구분이 나는 버겁다. 취향과 여유를 가지고자 하는 개인적인 소비의 자유마저도 한국식으로 묶어 까내리는 강요와 압박이 두 단어의 함의 안에 진하게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돈을 쓸 자유마저도 간섭당하고 살지는 않겠다. 그러니 나는 한국적 정서에 기반해 스튜핏하다는 말을 듣기를 거부하겠다. 이대로 두세요. 그거면 됩니다. 

1) 물가 뛰는데 가처분소득 3년째 줄어…청년은 쓸돈이 없다, 동아일보 

2018.02.08 18:26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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