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서바이벌 게임: 길모어 걸스

드라마 <길모어 걸스>의 첫번째 시즌은 주인공 로렐라이 길모어가 딸 로리의 사립고등학교 학비를 빌리기 위해 평소 왕래 없이 지내던 자신의 부모를 찾아가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로렐라이의 부모인 에밀리와 리처드는 연락도 없이 찾아온 딸을 보고 깜짝 놀라며 "벌써 추수감사절인 거냐?"고 묻는다. 나는 <길모어 걸스>의 전 시즌을 열 번쯤 돌려 보았지만, 저 때만큼 나에게 큰 감동을 준 장면은 없었다. 부모와 1년에 한 번, 추수감사절에만 만나면 되다니! 완벽한 삶이다.

5년 전 가을 이맘때 서울행을 결심할 당시,

나는 순진하게도 이제부터는 내가 원하는 만큼의 자유가 충분히 확보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역시 부모란 내 상상 밖의 강한 존재였다. 내가 KTX로 2시간 반 걸리는 곳으로 떠나온 사실은 자녀를 부모의 소유물로 여기는 이들의 마인드셋에 아무런 균열을 일으키지 않았다. 내가 사회에서 제아무리 훌륭한 일을 해냈어도 부모의 고교 동창 단톡방에 자랑할 수 없는 업적은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엄마는 아무 때고 전화를 걸어와 자신은 불행하다고, 더 이상 살고 싶지가 않다고, 그러니 네가 얼른 시집을 가라고, 아이를 낳으라고, 어서 이런저런 이벤트를 연출해서 자신을 주인공으로 만들어달라고 요구했다.

나는 완전한 단절을 꿈꾸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혼자서는 해내기 어려울 것 같아 전문가(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의 지원도 받았다. 그러던 어느날 기회가 왔다. 마침내 엄마로부터 "너희 아빠와의 가족 관계를 없애고 싶다."는 내용의 문자메세지가 도착한 것이다. 엄마야 그게 늘 하던 소리였겠지만 단절의 계기로 삼기에는 아무런 모자람이 없었다. 나는 이 문자메세지를 캡쳐해 아빠에게 보냈다. 그리고 이혼을 하시든지 마시든지 알아서 하시라고, 저야말로 두 분과의 가족 관계를 없애고 싶으니 연락하지 말라고 통보했다. 지금 생각해도 참 나무랄 데 없는 시나리오다. 쓰기도 내가 썼고 연출도 감독도 내가 했으며 출연까지 했다. 완벽하다.

가족과 인연을 끊고 2년 반을 살았고, 놀랍게도 지금까지 아무런 문제가 없다. 

부모와 연을 끊은 탓에 부가적인 인연(남동생을 비롯한 친인척들)도 싹 정리해야 했으나, 정말 놀랍게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가족이 보호하지 않는 독신 여성에게는 굉장히 위험한 일이 일어날 것 같지만, 나를 저주한 것도 칼로 협박한 것도 돈을 빼앗으려 한 것도 모두 내 가족이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것도 그 자리 앉았던 사람 나름이다.

한동안 밍밍한 서울 김치가 괴로워서 몇 번인가 칼국수집 가서 겉절이 김치를 사 먹기는 했다. 이것도 다 지난 이야기다. 요즘 누가 밀가루랑 나트륨을 먹나? 짠 건 몸에 나쁘다. 그리고 물은 축축하다. 

2017.10.03 21:19 발행

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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