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이갈리아의 딸들』은 새로운 시작이다

이갈리아의 딸들 표지 그림 박혜림

『이갈리아의 딸들』은 페미니즘의 고전으로 꼽히는 저서다. 1977년에 출판되었으니 이제 40년의 시간이 흘렀다. 이 책은 40년 동안 줄곧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이는 책의 내용이 그 정도로 전복적이기도 하고, 한편으로 현실의 변화가 지난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도 1996년에 출판된 이래 스테디셀러로 자리매김했지만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갈리아의 딸들』이 새롭게 부상하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이 책이 2015년에 등장한 ‘메갈리아’의 기원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메갈리아는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혜성

‘혜성’. 메갈리아 하면 떠오르는 단어다. 메갈리아는 그야말로 혜성처럼 등장했다. 그리고 메갈리아가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은 마치 혜성과의 충돌만큼이나 강력했다. 여성들의 아우성에 귀를 막고 눈을 감는 한국 사회가 메갈리아에 반응했던 것은 ‘미러링의 동질성과 이질성’ 때문이었다. 미러링은 무시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선 당혹감과 불편함을 불러일으켰다. 사실 미러링의 내용은 지금까지 남성들이 주야장천 해왔던 언행이기에 누구에게나 굉장히 익숙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러링을 매우 낯설게 느끼고 있다. 언행의 주체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기 때문이다. 똑같은 언행도 주체가 남성이냐 여성이냐에 따라 이렇게 다르게 느껴진다는 사실을 메갈리아 덕분에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메갈리아는 미러링을 통해 한국 사회에 두 가지를 보여 주었다. 하나는 지금까지 주체였던 남성들의 민낯이다. 남성들은 시선의 주체를 자임하며 여성들의 외모와 행실을 평가하고 명명을 통해 칭찬 또는 처벌을 해왔다. 마치 판옵티콘의 간수와 같던 남성들이 미러링에 의해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메갈리아의 거울은 남성들의 일그러진 민낯을 또렷이 비추었다. 다른 하나는 한국의 여성혐오가 임계점을 넘어섰다는 것이다. 미러링 자체가 여성들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상태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메갈리아가 앞장서자 많은 여성들이 응답했다. 흩어져 있던 여성들의 목소리가 모이고 있을 뿐 아니라 침묵했던 여성들까지 목소리를 내고 있다.

새롭지 않은 존재

이처럼 메갈리아는 한국 사회에서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 그렇지만 페미니즘 역사에서는 새롭지 않다. 메갈리아라는 명명이 명시하고 있는 것처럼 메갈리아는 『이갈리아의 딸들』의 계보를 잇고 있다. 다만 메갈리아의 미러링이 언어를 위시한 문화에 집중되어 있다면, 『이갈리아의 딸들』은 문화뿐 아니라 정치, 사회, 경제, 역사, 법, 제도, 종교 등을 아우르며 현재와 반대되는 ‘세계를 창조’했다. 『이갈리아의 딸들』의 놀라운 점은 그 세계의 정교함과 개연성이다. 『이갈리아의 딸들』의 논리와 흐름은 빈틈을 찾기 어렵다. 게다가 게르드 브란튼베르그는 굵직굵직한 장면들뿐 아니라 일상의 미세한 부분과 순간에서까지도 가부장성을 짚어낸다. 그의 책을 통해 우리는 미처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가부장성을 발견하면서 우리의 세포 하나하나까지 가부장제에 젖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갈리아의 딸들』은 우리의 뇌를 흔드는 충격을 준다. 그렇지만 그것은 ‘안전한 충격’으로 간주된다. 『이갈리아의 딸들』이 창조한 세계는 충분히 있음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허구’라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메갈리아의 미러링은 문화에 집중되어 있을지라도 결이 다르다. 메갈리아는 허구가 아니라 현존하기 때문이다. 메갈리아는 가시적으로 세상을 바꾸고 있다. 한국 사회가 메갈리아의 미러링이 안전하지 못하다고 느끼는 이유다.

『이갈리아의 딸들』은 허구이기에 안전하고, 메갈리아는 현존하기에 안전하지 못하다는 느낌은 일견 그럴듯하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피상적인 반응일 수 있다. 『이갈리아의 딸들』과 메갈리아의 관계만 살펴봐도 그렇다. 『이갈리아의 딸들』이 허구에 머문다는 생각은 메갈리아라는 존재에 의해 도전받는다. 그렇다고 메갈리아가 『이갈리아의 딸들』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것은 아니다. 반대로 『이갈리아의 딸들』이 메갈리아에 생명을 주었다. 메갈리아는 ‘『이갈리아의 딸들』의 딸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메갈리아의 등장에 주목하고 고무되고 긴장하고 고민하고 분노하는 모두는 『이갈리아의 딸들』을 정독해야 한다. 『이갈리아의 딸들』은 현실과의 공명을 통해 탄생했고, 지금도 현실과 함께 숨 쉬고 있다. 『이갈리아의 딸들』은 쉬우면서도 통찰력과 설득력을 바탕으로 여성혐오를 전복할 수 있는 무기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이갈리아의 딸들』은 ‘페미니즘은 어렵다’, ‘현실을 바꾸는 데 무력하다’, ‘여성과 남성의 성대결을 조장한다’, ‘이미 여성 위주의 사회다’ 등등 비난과 백래쉬에 대한 훌륭한 반증이다.

『이갈리아의 딸들』을 읽어야 하는 이유

페미니즘은 오랫동안 소통, 공감, 연대를 지향해왔다.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소통, 공감, 연대는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타자성을 바탕으로 한다. 하지만 주체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타자성을 인지/인정하기가 쉽지 않다. 남성 주체 vs 여성 타자라는 이분법은 자연화되어 있어서, 생득적인 성별 위계를 인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남성뿐 아니라 여성도 이를 인지하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타자의 삶을 사는 여성들은 존재론적 고통과 남성과의 비교를 통해 어느 정도의 자각이 가능하다. 자각이 시작되면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도 보게 되면서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게 된다. 

더욱이 이러한 문제의식을 자신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많은 여성들이 공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현실을 바꾸려는 용기와 욕망이 샘솟게 된다. 무엇보다 수많은 여성들이 수많은 세월 동안 지적, 신체적, 감정적 노력을 쏟은 결과가 현재라는 사실은 여성들이 스스로를 단단히 벼리게 만든다. 결국 사회 변화의 필요성과 전략에 대한 여성들과 남성들의 생각의 간극이 점점 벌어지면서, 현실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많은 남성들과 거기에 분노하는 여성들의 갈등이 여성혐오를 둘러싸고 격렬하게 표출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이갈리아의 딸들』이 재조명받는 것은 이 작품이 여성혐오의 근원인 성차에 천착하면서 ‘생물학적 필연성을 가장한 우연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여성과 남성의 성차는 명확해서 부정할 수 없으며, 그 차이로 인해 여성과 남성의 역할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굳건한 믿음이 성차별의 근간이다. 차이가 차별로 자연화되는 것이다. 『이갈리아의 딸들』은 바로 이 성차에 기반한 차별과 혐오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성차의 핵심은 재생산 능력이다. 현실 세계에서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폄하하는 주요 이유는 생리, 임신, 출산, 수유 등의 재생산 능력이다. 하지만 이갈리아라는 세계에서는 재생산 능력을 이유로 여성이 우월한 존재가 된다. 재생산 능력에 기반한 여성의 우월성은 상당히 설득력 있게 설명된다. 게다가 남성의 신체적 우월성으로 꼽히는 큰 키와 센 힘조차 ‘문명’에 의해 여성이 얼마든지 앞지를 수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래서 『이갈리아의 딸들』을 읽고 있으면, 현실 세계에서 다음 세대를 낳고 키우는 여성들이 왜 대우가 아닌 차별을 받는지, 그리고 양육과 재생산 능력은 무관한데 왜 여성이 양육을 전담하는지 의아해진다.

물론 그 의아함은 즉시 해소된다. 『이갈리아의 딸들』은 성차의 열등과 우월이 거대한 지배체제의 산물임을 명확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여성 지배 체제 하에서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가 긴밀히 맞물려 있는 양상을 보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남성 지배 현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가모두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주디스 버틀러의 어려운 이론을 이보다 쉽게 설명하는 책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이갈리아의 딸들』은 남성 주체에게 타자성을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선물’과 같다. 『이갈리아의 딸들』은 여성들의 타자성뿐 아니라 남성들의 타자성까지 보여준다. 여성의 타자성을 인지하고 인정한다면 여성과 남성은 동등한 인간이기에 남성도 역시 타자성을 지닌다는 사실을 명료하게 설명한다. 남성들이 자신의 타자성을 인지하는 것이 선물이 되는 이유는 그것이 가부장제의 실상을 직시하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남성들이 성토하는,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을 지운 이는 김치녀가 아니라 가부장제라는 사실 말이다.

당신들이 답할 차례

그래서 『이갈리아의 딸들』은 페미니즘 저서이지만 주인공은 남성이다. 이갈리아는 인류의 절반인 남성이 차별받고 있는 나라인데도 평등한(egalitarian) 유토피아(utopia)라고 규정된다. 누구의 시선에서의 평등이고 유토피아란 말인가. 게다가 우리들은 가부장적 시선에 익숙하기 때문에 이갈리아 나라의 전복적인 시선이 낯설기만 하다. 책을 읽는 내내 혼란스럽던 머리가 책의 말미에 페트로니우스가 쓴 소설 『민주주의의 아들』을 보자마자 정리되는 경험을 하면서 우리들이 ‘비정상이 정상인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곧, 여성을 동등한 인간으로 보지 않고 재생산과 성적 쾌락을 담당하는 성적인 도구로 간주하는 현실의 비정상성이 사무친다.

소설은 차별받는 남성들의 투쟁으로 끝나지만, 이것은 새로운 시작이다. 이갈리아라는 나라는 현실의 여성 독자들에게 통쾌할지 몰라도 여성들이 원하는 나라는 아니다. 또한 남성 독자들에게 불쾌할지 몰라도 남성들이 그 면면을 부정할 수 없는 나라다. 결국『이갈리아의 딸들』은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묻는다. 우리가 원하는 세상이 어떤 모습이냐고. 그런 세상은 지금까지 존재한 적이 없었기에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 지난한 시간을 견뎌야 할 것이고 수많은 시행착오에 부딪힐 것이다. 하지만 하나는 명백하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여성들뿐 아니라 남성들의 동참이라는 사실이다. 이제 『이갈리아의 딸들』의 호명에 남성들이 답할 차례다.

2016.12.19 09:56 발행

여성을 위한 미디어,
핀치와 함께하세요.

핀치클럽 가입자는 모든 콘텐츠를
자유롭게 즐기고 스크랩할 수 있습니다.

핀치클럽 가입

You may also like

기사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