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다른 연극 3. 조건만남 & 기억이란 사랑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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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다른 연극 3. 조건만남 & 기억이란 사랑보다

김남이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6월20일, 제 1회 페미니즘 연극제가 개막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질문을 던지는 연극들을 소개한다. 인터파크에서 모든 연극을 예매할 수 있으며 핀치클럽은 40% 할인을 받을 수 있다.

극단 '애인'은 2007년에 창단한 장애인 극단이다. <고도를 기다리며> 등 기존 희곡을 재해석하거나 실험적인 창작극을 통해 연극의 지평을 넓히고 있다. 제1회 페미니즘 연극제에서는 <조건만남>과 <기억이란 사랑보다>(김지수 연출)를 옴니버스 식으로 상연했다.

<조건만남>

ⓒ성효선

이 작품은 본래 극단 애인이 페미니즘 연극제 이전에 이미 몇 차례 상연했었던 창작극이다. 극은 사회에서 주변화 된 인물들 중 두 전형인 성판매여성과 장애남성 사이의 섹스 거래를 두고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이번 연극제에서는 성역할을 바꾸어 공연한다.

휠체어를 타고 있는 지체장애여성 희윤은 섹스를 하기 위해 성판매남성 경민을 모텔로 부른다. 경민이 지체장애인 희윤의 신체를 보고는 얼어붙자 희윤은 “뭐, 문제 있어요?” 라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되묻는다. 그러나 경민은 “보호자 없어?”라며 반말로 희윤을 무시하고 성판매를 거부한다. 계속되는 경민의 무시와 모욕에 희윤은 “몸 팔러 왔으면 몸이나 팔어!”라며 모욕을 되돌려준다. 모욕의 실갱이는 결국 몸싸움으로 번진다. 휠체어를 탄 채 경민을 향해 공격적으로 돌진하는 희윤과, 그녀를 향한 분노를 금치 못하는 경민의 위협적인 몸짓. 그 둘은 그렇게 서로를 공격하며 무대 장치들을 넘어뜨리고 부순다.

넌 평생 침대 위에서나 살아라!
넌 평생 휠체어 위에서나 살아라!

이들의 이런 말들은 서로에게 저주를 퍼붓는 것일까, 서로를 연민하는 것일까? 결국 둘은 휠체어 위에서 함께 드잡이하듯 몸이 엉겨 붙은 채 극이 끝난다.

장애, 여성, 성

ⓒ성효선

<조건만남>은 2005년 한 장애남성의 성구매기를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그렸던 <핑크팰리스>(감독 서동일)와 유사해 보이지만 실상 아주 다르다. <핑크팰리스>는 이제껏 비가시화 되었거나 성적 무능으로 상징되는 장애인의 성을 가시화시켰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여전히 성적 만족을 ‘성욕의 해소’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점, 그리고 성기중심적 섹스에 집착하고 있다는 점은 문제적이다. 이런 문제들은 해당 다큐의 감독과 중심등장인물인 장애인의 성이 ‘남성’이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성욕은 통제할 수 없어 ‘해소’되어야 하고, 그것은 삽입과 같은 성기 중심이어야 한다는 통념들, 즉 남성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정상적인’ 섹슈얼리티에 관한 담론들이 그대로 투영되고 강화되면서 장애남성도 비장애남성과 동일하다는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다큐에서는 정작 장애여성의 섹슈얼리티나 성판매 여성의 목소리는 지워져 있었다.

그에 반해 연극 <조건만남>은 장애여성의 성을 다룬다는 점, 그리고 성판매남성의 목소리 또한 직접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핑크팰리스>와는 완전히 궤를 달리한다. 겉으로 보기에 연극 <조건만남>이 <핑크팰리스>와 다른 점은 성판매여성과 성구매장애남성을 성판매남성과 성구매장애여성으로 역전시킨 것에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장애인의 성이 미미하나마 사회적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장애인의 성담론에 있어서도 여전히 성구매자나 성서비스 수요자는 남성이고 성판매자나 성서비스 제공자는 많은 경우 여성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사회가 거의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 이 연극은 성역할을 바꿔볼 것을 제안한다. (그런데 단순히 성역할을 역전시킨 점이 해당 작품 내에서, 혹은 작품을 벗어나 장애인과 성에 관한 담론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서 나는 다소 회의적이다. 극이 그러한 이야기를 담기에는 너무 짧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문제를 회피한다는 인상마저 주고 있기 때문이다.)

ⓒ성효선

그러나 사실 이 극에서는 성역할의 역전 외에 더 중요한 지점들이 존재한다. 이 극이 장애인의 섹슈얼리티뿐만 아니라 성판매자의 구매자 선택여부도 함께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서로가 사회에서 얼마나 주변화 된 인간인지 생채기를 내며 확인시켜주는 공격적인 대화들은 단순히 장애인 성욕의 문제뿐만 아니라 더 많은 의문들을 촉발한다.

희윤은 구매자의 위치에도 불구하고 경민의 위협적인 몸짓에 (옷을 벗길 것을 요구하면서도 역설적으로) “내 몸에 손대지마!”라고 외친다. 성 거래 현장에서도 남녀의 불균형은 여전히 유효한 것일까? 희윤에게 성서비스는 성욕의 ‘해소’를 위한 것인가, 타인과의 친밀한 관계를 통한 정신심리적 ‘만족’을 위한 것인가? 혹은 성판매자는 그가 여성이든 남성이든 자신이 판매할 대상을 고를 권리는 없는가? 왜냐하면 돈으로 성을 구매한다고 해서 판매자의 성판매 거부라는 결정을 묵살할 수 있다는 결론이 저절로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의문들을 제기하면서도 이 극은 이런 문제에 대해 어떤 답도 주지 않는다. 다만 현실 사회에서는 비가시적인 몸들이 연극이라는 허구적 공간에서 비로소 가장 생생하게 활력을 갖게되는 순간을 포착할 뿐이다.

<기억이란 사랑보다>

ⓒ성효선

도장을 새기는 일을 하는 지체장애여성 영숙은 버스에 가방을 두고 내렸다며 도움을 요청하는 비장애여성 정주영을 만난다. 그녀는 영숙에게 꼬치꼬치 일상을 캐묻지만 영숙은 시큰둥한 대답으로 더 이상의 질문을 거부한다. 갑자기 주영은 곧 있을 혼인신고를 위해 필요한 도장을 파줄 것을 요청하고, 곧이어 도착한 자신의 파트너를 영숙에게 소개한다. 그녀의 파트너는 또 다른 장애여성 차수영. 그런데 주영이 실은 오래전 집 떠났던 영숙의 딸이었음이 밝혀지고, 주영과 수영은 어머니 영숙에게 자신들의 사랑을 인정받으려 한다.

이 극의 서사는 특별한 갈등 없이 매우 느리고 헐겁다. 그런데 이 작품에 비장애인 위주의 작품에게 요구되는 ‘예술적 완성도’를 요구하는 것이 정당한가라는 물음을 떠나서, 이 작품이 서사의 측면에서 소수자들의 세밀한 차이에 질문을 제대로 해내고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극의 등장인물들은 이른바 ‘정상성’에서 비껴나간 소수자들(장애여성, 장애남성, 레즈비언, 심지어 버려진 동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극이 등장인물들을 모두 사회적 소수자로 채웠다는 것과 극이 소수자들에 관한 예민한 문제들을 치밀하게 다루고 있다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장애인 연극이 한국의 열악한 환경에서 이제 막 시작 단계에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런 지점은 다소 아쉽다.

ⓒ성효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극이 극예술의 특성 혹은 한계를 지적하는 중요한 순간들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은 바로 무대 위에서의 ‘장애인 배우의 장애신체 현존’ 때문이다. 장애인 배우의 존재 자체가 문제가 되는 순간은 사실 두 번째 극이 상연되기 전의 인터미션부터였다. 세트를 변경하는 이들도 역시 극단의 장애인들이었는데, 무대는 암전상태지만 완전히 어두운 것은 아니라서 세트를 변경하는 장면이 비교적 잘 보인다. 아마도 장애인 배우들이나 스텝들의 안전을 위해서였으리라. 

그런데 이 인터미션에는 이해해야 할 줄거리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관객들은 장애인 스텝의 신체적 부자연스러움을 오로지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연출가의 의도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이때부터 관객은 줄거리 상의 장애연기를 하고 있는 ‘장애배우 캐릭터’와 무대 위에 현존하는 ‘장애배우의 진짜 신체’를 분리해서 볼 수 있게 된다.

무대 위에 존재하는 몸

극의 줄거리보다는 생생하고 낯선 ‘장애배우 신체’ 자체가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이 낯선 신체는 두 번째 극 <기억이란 사랑보다>의 느슨한 줄거리를 메꿔주는 일종의 볼 거리, 즉 스펙타클로 작용한다. 이 극은 장애배우들의 신체 움직임과 그 리듬에 유독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가령 지체장애인 영숙이 도장을 파고 있는 행위는 아주 세심하고 느리게 상연된다. 또한 장애인 영숙이 손으로 수제비 반죽을 뜯고 있는 행위와 비장애인 주영이 손으로 진흙을 빚고 있는 행위가 갑자기 두드러지면서 대조를 이룬다. 대사 전달력이 약한 지체장애인의 목소리는 간혹 알아들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도 고유하고 기묘한 청각적 자료로 감지된다. 그러니까 장애배우들의 실제 신체는 극의 줄거리에서 분리되어 그 자체 극의 스펙타클로서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성효선

비장애인들이 삶에서 장애인들의 신체를 이렇게 자세하게 뜯어볼 수 있었던가? 그런 일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현실에서 비장애인이 장애인의 신체를 – 낯선 놀라움의 시선이든 혐오의 시선이든 – '볼 거리'로 생각한다는 것 자체는 일종의 죄책감을 낳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허구적 공간인 무대에서 장애배우의 신체가 스펙타클로 작용하는 것은 어떤 예술적, 윤리적 문제를 낳는가? 장애배우는 비장애배우와 동일한 ‘배우’로서 봐야하는가, 차이가 인정되는 ‘특수한’ 배우로서 봐야하는가? 장애배우의 실제 신체가 무대에서 두드러져야 하는가, 줄거리에 잘 녹아야 하는가? 장애인의 신체에 젠더는 어떤 방식으로 개입되는가? 

흥미롭게도 이렇게 제기되는 문제들은 페미니즘에서 성차를 다루는 문제들과 중첩되고 있다. 다층적 관점이 교차하는 장애배우의 신체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문제제기를 한다는 점에서, 이 극은 꼭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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