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드웨이를 이끄는 여성 캐릭터들 18. 넬리

알다여성 주인공뮤지컬

브로드웨이를 이끄는 여성 캐릭터들 18. 넬리

이응

일러스트레이션: 솜솜

뮤지컬 <South Pacific>

초연 1949년 Majestic Theatre, New York
작곡 Richard Rodgers
가사 Oscar Hammerstein II
대본 Oscar Hammerstein II, Joshua Logan
원작 "Tales of the South Pacific" by James A. Michener
연출 Joshua Logan
수상 토니상(1950) -작품상, 대본상, 스코어상, 여우주연상, 여우조연상, 남우주연상, 남우조연상, 연출상, 무대디자인상
퓰리처상 대본 부문 (1950)

 

뮤지컬 <남태평양>은 토니상 최초로 흑인 여성인 후아니타 홀이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던 작품이다. 당시 기준으로는 인종 간의 차별을 감싸 안는 인물들을 그리는 등 사회적인 메세지를 담고 있었기에 1950년 퓰리처상 드라마상도 수상했다. 오스카 해머스타인 쥬니어와 리차드 로저스 콤비 입장에서는 첫 작품인 <오클라호마!>로 퓰리처상 특별상을 받은 이후 두 번째 수상이다. 사회적인 이슈에 관심이 많았던 작가이자 작사가였던 오스카 해머스타인 쥬니어는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이자 흑인 민권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기 직전, 1950년에 미국 사회가 인종차별에 대해 가지고 있던 거부감을 작품 안에 담았다. 로자 파크스가 버스에 올라타 백인 전용 의자에 앉았던 해가 1955년이었으니 그보다 5년이나 이른 시기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작품 안에 담긴 인종차별에 대한 인식은 우월한 백인이 베푸는 너그러움 이상으로 확장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 뮤지컬을 통해서 뮤지컬 콤비 로저스&해머스타인이 만들어 낸 수많은 주인공들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여성인물이 탄생했다. 바로 주인공인 넬리다.

줄거리

* 이하 뮤지컬 <South Pacific> 내용 누설이 있습니다.

2차 대전 중, 한참 미국군이 일본군과 전쟁 중인 남태평양의 어느 섬. 서로 다른 두 개의 사랑 이야기가 교차하며 전개된다. 하나는 교전 중이던 섬에 새로 부임한 해병대 장교인 조셉 케이블이 원주민 장사치 블러디 메리의 딸인 리아와의 달콤한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다. 블러디 메리는 딸을 잘생긴 장교에게 시집 보내 미국에서 살 꿈을 꾼다. 나머지 하나는 사병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종군 간호사 넬리가 그 섬에 살고 있는 프랑스인 에밀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다. 해군에서는 섬의 지리를 잘 알고 있는 에밀에게 조셉과 함께 비행기로 침투해 달라고 부탁하는 입장이지만 그는 넬리와 사랑에 빠져 죽을 수도 있는 임무를 망설이고, 조셉은 본국에 두고 온 약혼자와 리아 사이에서 고민한다. 

조셉은 리아와 결혼하지 않으면 다시는 딸을 볼 생각 말라는 블러디 메리의 엄포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넬리는 에밀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만 그의 집에서 만난 아이들이 세상 떠난 원주민 전 아내 사이에 낳은 친자식들이란 사실을 알게 되자 장군에게 달려가 전근을 요청한다. 사랑 때문에 힘들어진 두 남자는 정찰 임무를 맡아 날아가고 그제야 마음을 깨달은 넬리는 에밀의 집에서 에밀의 두 아이를 돌보며 기다린다. 에밀은 살아서 돌아와 넬리와 사랑을 확인하지만 조셉은 전사하고 블러디 메리는 석양 속에서 딸을 끌어안고 오열한다.

넬리

이십대인 넬리는 뉴욕이나 LA 같은 대도시가 아니라 마국 중부 아칸사스 주 출신의 간호사다. 헤밍웨이의 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의 캐서린과 직업도 같고 전쟁 통에 사랑에 빠지는 것도 같지만,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넬리는 전쟁의 참혹함이나 인생의 무상함을 뮤지컬에서 발견하기에는 지나치게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뮤지컬의 주인공이다. 그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무지막지한 미국인들의 애국심, 전쟁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아름답다는 것, 그리고 사랑에는 인종도 없다는 박애주의를 담은 아름다운 멜로디와 가사의 노래들이다. 

그다지 세련되지 않은 이런 '암초'가 우글거리는 작품 속에서 넬리는 어떻게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 명의 당당한 캐릭터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우선 넬리의 장점을 보자. 주변 누구라도 친구가 되고 싶어 할 성격이다. 자기 의사가 명확하면서도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는 놀라운 재주가 있고, 자기 주장을 할 때는 장군 앞이라도 가리지 않지만 가장 아래 계급의 사병에게도 상냥하게 대한다. 그러면서 누구에게도 착각할 여지는 주지 않는 현명한 인물로 그려진다. 단점은 스스로의 대사를 빌자면 단순하다는 것. 아니 잠깐. 정말 넬리는 단순한 캐릭터일까?

전쟁 중의 종군 간호사란 극중 사병들의 대사에 의하면 ‘장교를 위한 특별식’이다. 이런 사병들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잘생긴 해병대 장교 조셉 케이블이 도착하자 사병들은 애당초 그들의 것이 아닌, 마치 한 동네 사는 아이돌과도 같은 넬리를 '빼앗길까봐' 경계한다. 정작 조셉과 넬리 사이에선 아무런 스파크도 튀지 않는다. 조셉은 본국에 약혼녀가 있고, 넬리는 같은 섬에서 이미 썸을 타는 에밀이 있기 때문이다.

대본이 준 넬리 이상의 넬리

넬리와 에밀의 관계는 이후 로저스와 해머스타인 쥬니어의 마지막 뮤지컬인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다시 한 번 변주된다. 아이 딸린 중년 남성과 사랑에 빠지는 이십대의 순수한 여성이라는 도식을 통해, 남성에 대한 이상형과 여성에 대한 이상형의 극단적인 차이를 그대로 보여준다. 즉, 남성은 산전수전 공중전을 겪으며 ‘원숙’해질수록 매력적이지만 여성은 부모에게서 받은 몸 그대로 ‘깨끗하게’ 자라난 젊은 여성일 때 가치가 더욱 커진다. 시골 출신 순진한 성격의 간호사라는 설정은 남성들이 지닌 여성에 대한 판타지 그 자체다. 

이러한 이중적인 가치관이 죄책감도 하나 없이 천연덕스럽게 담겨 있는 작품이건만, 넬리는 그 와중에도 살아남는 정도가 아니라 큰 사랑을 받는 인물이다. 작가인 오스카 해머스타인 쥬니어가 뮤지컬의 가장 큰 가치를 사랑이라고 여겼고 그 사랑을 이어가는 키는 여성이 쥐고 있다고 믿은 덕분인지 몰라도, 그의 작품 속 여성들은 한없이 고전적이면서도 어딘가에서 전형성을 찢고 나온다. 

그리고 이렇게 캐릭터가 매력을 잃지 않는 배경에는 결국 이 역을 연기해 온 배우들의 힘이 받쳐주고 있다. 배우에게 주어진 대사나 노래는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시골 소녀일 뿐인데"였지만, 어느 배우도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넬리'를 연기하지 않았다. 브로드웨이의 전설인 오리지널 공연의 넬리 역이었던 메리 마틴이나 1958년 개봉한 영화 버전의 밋치 가너는 물론, 특히 링컨센터에서 리바이벌된 2008년 버전의 켈리 오하라는 사려 깊고 어른스러운 넬리를 보여주었다. 

오리지널 공연 포스터

변화하는 넬리

넬리가 가장 큰 충격을 받는 순간은 '원주민', 즉 흑인과 백인인 에밀이 결혼했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다. 단순하게 보자면 "아니, 내 애인이 결혼한 적이 있었다니!"하고 죽은 아내를 신경 쓴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넬리가 놀라는 타이밍은 명확하게 원주민처럼 보이는 아이들이 에밀의 자식이란 사실을 들었을 때다. 사실 이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에밀이 본국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쳐 온 사람이라는 점이다. 집안의 명예를 위해 결투하다 실수로 사람을 죽이고 이곳으로 도망쳐 왔다고 고백한 에밀을 오히려 위로하고 "난 정말 멋진 사람과 사랑에 빠졌어"를 부르며 기뻐하던 대인배 넬리가, 원주민 여성과 결혼해 아들 딸을 두었다는 사실에는 혼비백산하며 엄청난 내적 갈등을 겪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살인이 그렇게 너그럽게 넘어갈 일인가 하는 의문에 혼란이 올 지경이다. 1949년에는 한 백인 남성이 살인을 하는 것보다 유색인종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 더 큰 문제였음을 이 장면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넬리는 에밀이 자신보다 나이도 많고 경험도 많고 부자인 유럽 사람이라 사귈 수 없을 거라며 "그 남자를 머릿속에서 씻어버릴래" 하고 샤워를 하면서 노래한다. 머리카락에 거품을 보글보글 만들며 남자에 목매지 않겠다고 노래하는 장면은 뮤지컬 역사에 남는 명장면이다. 하지만 에밀이 원주민과 결혼했다는 사실 앞에서 당찬 넬리는 거품처럼 꺼져버린다.

넬리가 거기서 그대로 도망쳐 버렸다면 넬리도 그저 그런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넬리는 에밀이 꼭 나서지 않아도 되는 임무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는 사실을 듣고, 에밀에 대한 자신의 사랑과 과거 에밀의 사랑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넬리는 다른 인종에 대해 가졌던 자신의 편견을 버리고 성큼 한 발 나아간다. 아칸사스에서 평생을 살았다면 죽을 때까지도 알지 못했을 내면의 편견을 극복하게 해 준 비결은 사랑이다. 아마도 이것이 해머스타인 쥬니어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픈 진심이었을 것이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태어났어도
우리는 그저 다름없는 사람들

넬리가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에밀에게 부르는 작품 속의 마지막 노래이자 고백은 이 뮤지컬이 온 세상을 향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다. 만약 폴리네시아인인 블러디 메리를 돈만 알고 미국으로 가기 위해 딸이라도 팔 기세인 인물로 그리지 않았다면, 만약 그 딸 리아를 어머니가 점지해 준 말도 통하지 않는 남자와 두 말 않고 잠자리를 함께 하는 인물로 그리지 않았다면, 만약 발리를 동양 어딘가에 존재하는 인신공양의 섬으로 그리지 않았다면 말이다. 

이 뮤지컬의 쇼 장면인 독립기념일 공연에서 가슴에 코코넛 브래지어를 달고 무대 위에 병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올라오는 것은 여성 간호사들이 아니라 우락부락한 사병들이다. 여성인 넬리는 해군 제복을 입고 무대 위에서 남자 배역을 소화한다. 여성의 몸을 눈요깃거리로 전락시키지 않는 장면은 1949년 작품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치 사려 깊다. 더불어 코믹한 효과도 제대로 잡는다. 

오리지널 넬리 역의 메리 마틴 

하지만 백인인 넬리와 에밀이 인종을 초월해 서로를 끌어안는 동안 정작 그 ‘낯선’ 인종을 묘사하는 무지에 가까운 방식은 불편하기 짝이 없다. 오로지 넬리만이 그 편견의 숲을 헤치고 나아간다. 해머스타인 쥬니어의 여성 주인공들에게 항상 따라다니는 캐릭터 설명인 '나이브'라는 단어는 어쩌면 한참 전에 버렸어야 하지 않을까? 그의 작품들이 현대까지 이어질 수 있게 해주는 가장 강한 열쇠가 바로 그 여성 캐릭터들인데 말이다. 그리고 그들을 당당하게 연기하며 작가가 미처 쓰지 못한 생명을 불어 넣어준 배우들이 존재하기에, 68년이 지난 지금 여성 캐릭터들은 넬리가 지닌 한계를 딛고 더 단단한 땅을 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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