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TERTAINMENT

저는 한국의 게이머입니다. 아, 여자고요. (上)

해일

처음 게임을 접했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게임을 하면 두뇌 계발이 된다고 TV나 신문 등에서 온갖 게임기를 홍보하던 시절, 오락실의 입구에는 항상 조잡한 스티커로 ‘지능계발’ 이라는 문구가 붙어있고 브라운관 TV에는 16개도 안 되는 그래픽과 조잡한 음악이 커다란 재미를 주던 시절. 또래 친구들이 갖고 싶어 하던 선물 1위가 전자오락기였던 시절.

지금이라고 다를 것도 없지만, 장난감은 남성용, 여성용이 암묵적으로 정해져 있었다. 게임기는 주로 남자아이들의 몫이었다. 어쩌다 기회가 되어 게임기를 얻게 된다 하더라도 게임의 선택권은 전적으로 경제권을 가진 부모들에게 달려 있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의 내가 게임을 고르는 데에 몇 가지 암묵적인 규칙이 있었다. 탱크가 나오는 건 탈락, 총을 쏘는 건 탈락, 싸우는 게임은 탈락. 이런 식으로 리스트에서 몇 가지 빠진 상태에서 마음에 안 차는 게임을 선택하거나, 그런건 남자애들이나 하는 게임인데 우리 애는 하더라. 같은 소리를 감수하며 앞서 탈락했던 게임들을 해야 했다.

시장이 커지면서 온갖 게임들이 나오게 되자, 어쩌다가 여성용 게임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온 게임들은 마치 어릴 때 TV에서 광고하던 만화 캐릭터 신발에서 곁다리로 끼워팔던 핑크색의 ‘여아용’ 신발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성 게이머’하면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이미지는 어떤 것일까? 업계나 다른 게이머가 보기에 ‘여성 게이머’는 어떤 존재일까? n0년간 ‘여성’인 게이머로 살아오면서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겪었던 크고 작은 일들을 나열해 본다.

온라인

컴퓨터가 좀 더 대중적으로 보급되면서 나의 교우 관계는 자연스럽게 게임이나 컴퓨터를 좋아하는 친구들로 고정되어 갔고 그 친구들과 삼국지나 대항해시대 같은 게임 공략에 관해 소소하게 얘기를 하던 나의 게임 세계는 PC 통신 - 인터넷을 만나 급격하게 확장되어 갔다.

PC통신에는 한 작품만을 밀도 있게 파는 커뮤니티들이 작품별로 존재했고 친구들과 얘기했을 땐 알수 없었던 온갖 자료들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별천지 같은 세계에서 같은 취미를 가진 모니터 너머의 상대와 대화를 나누는 게 즐거웠다. 그런 식으로 사람을 사귀어 가다 보면 여성 게이머라면 응당 지나쳐야 할 일종의 관문을 거치게 된다.

‘여자가 이런 게임을 왜 함?’
‘XX(여성 멤버 이름)? 걔 게임 쥐뿔도 모르는데 이쁘다고 하는거잖아.’
‘ㅇㅇ 회사 게임은 캐릭터빨로 밸런스가 엉망인데도 여성팬들이 더 많은데 ㅁㅁ 회사 게임은 시스템이 좋아도 (캐릭터 디자인이 구려서) 여성팬이 없다.’
‘XX는 애인도 군대 갔는데 이 게임 계속해?? 왜??’

이런 문장들은 공통적으로 밑바탕에 하나의 사상을 깔고 있다. ‘여자 게이머는 진짜 게이머가 아니다.’

그 공간은 여자들에게 ‘여자치고는 잘한다’ 거나 ‘되게 남자답게 게임 한다.’ 라는 말을 칭찬으로 하는 공간이었다. 인간의 적응력은 굉장하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보면 그 말을 당연한 칭찬으로 인식하게 된다. 굳이 대답할 가치들이 없는 말이었음에도 주변의 영향을 받기 쉬웠던 어릴 땐 그 말이 어찌나 큰 무게감으로 다가오던지. 'ㅁㅁ캐릭터는 여자애들이나 좋아하는 거야' 따위의 얘기를 들으면 ‘나는 그런 캐릭터는 안 좋아해.’ 하며 굳이 다른 캐릭터를 고른다거나, 진짜 게이머라면 AAA를 해야 한다 같은 얘길 듣고 관심도 없는 AAA를 해보려고 억지로 매달려서 누군지도 모를 그 사람들이 인정하는 ‘진정한 게이머’ 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지금은 그냥 내가 ‘여자’였기 때문에 벌어졌던 일들이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어차피 같은 돈을 주고 게임을 즐기는데 내가 어떤 방식으로 게임을 즐기던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여성 유저는 동등한 게이머인 적이 없었다

MMORPG 게임을 시작했다. 이런 게임은 보통 같이하는 사람과 떠들면서 해야 더 재미있으므로 길드에 가입했다. 기억을 돌이켜 보면 각종 온라인 게임의 길드원 공개 모집 글에는 높은 확률로 ‘여성 유저 우대’ 같은 팻말이 붙어 있었다. 도대체 컴퓨터로 게임을 하는데 어느 지역에 사는지 몇 살인지 여자인지 남자인지가 왜 중요한지 알 수가 없었지만, 길드에 가입해서 자기소개를 하면 단지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주목받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우리 길드/커뮤니티에는 여자가 무려 몇 명이나 있다.가 길드/커뮤니티 사이의 자랑거리였고 누구도 그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여성유저라고 하면 특별 대우를 받는 일도 있어 그 혜택을 이용해 먹는 남성 유저들도 존재했고, 성별을 밝혔을 뿐인데 그런 식으로 내가/아는형이/아는동생이 당했던 경험들을 말하며 네가 정말 여자라면 무려 ‘인증’을 하라는 사람들이 또한 존재했다. 그렇다. ‘여자’가 온라인상에서 자기가 여자인 채로 남들과 어울리려면 사진이건 목소리건 다른 길드원들 앞에서 ‘인증’을 받아야 했다. 내가 서울시 서초구에 사는 남자 고등학생/자영업자/회사원이었다면 그런 식으로 끈덕지게 구는 사람들이 없었을 것이라는 건 말할 것도 없다. 그렇게 여자임이 인증되고 나면 게임 방식에 대한 훈계는 물론이요 딜 사이클, 아이템 구성부터 온갖 선생질이 딸려 오는 건 기본이었다.

가끔은 길드원중 하나가 여자친구와 게임을 같이 하기로 했다며 여자친구를 가입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보통 이 경우 남자친구는 만렙의 숙련된 캐릭터를 가지고 있고, 여자친구는 게임을 평소에 해본 적도 없는 사람인 경우가 있었다. 게임의 기본적인 조작법, 퀘스트 등으로 게임의 문법과 성취감을 느끼기도 전에 그렇게 대단한 ‘오빠’는 아무튼 다 자기가 알아서 해줄 테니 따라만 오라며 최대한 레벨업이 빠르고 이득을 볼 수 있는 코스로 버스를 돌아주며 자신의 강함을 마음껏 보여주고, 이게 뭐가 뭔지도 모른 채 막연하게 모니터를 구경하며 아무것도 안 하고 뒤만 쫓아다니며 마우스만 딸깍거리던 여성 유저는 접속이 뜸해지더니 어느 날부터인가 길드에서 보이지 않게 된다. ‘여자친구분은요?’ ‘게임이 재미가 없대요’.

왜 더 잘해야 해

대부분의 MMORPG 게임은 힐러, 딜러, 탱커 등으로 유저들의 직업과 역할이 나뉜다.

유명한 게임인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경우 지금은 레이드 컨텐츠 자체가 상당히 가벼워졌지만, 내가 한참 플레이를 하던 시기에는 레이드팀의 다수 인원들이 레이드 스케쥴을 맞추기 위해 오프라인으로 서로 어느정도 연결이 되어 있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이렇게 구성된 길드는 한번의 출정을 위해서 야구처럼 1군, 2군을 나누기도 하고 레이드가 없는 날에는 채집이나 재료 조달이 가능한 경우 그 재료들을 부 캐릭터를 이용해 채우고는 했는데 길드 자금 관리나 포인트 관리는 여자들이 잘 본다면서 여성 유저에게 시키려 하거나, 사정이 생겨 레이드에서 빠지게 되는 멤버를 채우기 위해 보조 힐이나 탱킹이 가능한 캐릭터를 가진 여성 유저들에게 추가로 부탁을 해서 레이드를 뛰게 하곤 했다.(여성 유저들은 그런 부탁을 하면 뒤로는 뭐라고 해도 앞으로 대놓고는 거절을 잘 안한다며 팀이 굴러가기 위해 길드의 엄마니 길드의 천사니 같은 소리를 하며 온갖 궂은 일들을 시켜댔다!)

이런 분위기에 답답해져서 인터넷 커뮤니티로 가 보면 여자들은 원래 보조해주거나 남을 보살펴주는 캐릭터를 잘한다느니, 딜러를 잡아봤자 딜사이클이 복잡해서 딜이 안 나오니 피만 열심히 채우면 된다느니 하는 식으로 자신들이 하기 지루하거나 귀찮아 보이는 직업군들을 여자들에게 시켜야 한다는 글이 보였다. 이따금 같은 게임 하는 여자친구를 갖고 싶고 기왕이면 딜러인 자기에게 힐을 해주는 상냥한 여자친구를 갖고 싶다는 사람들도 더러 보였다.

어쩌다 여자가 잘 하지 않는 직업군을 하게 되면 남들보다 몇 배는 잘해야 했다. 못하면 ‘우리 xx가 여자라서 잘 못 해.’ ‘xx는 오늘 감정적으로 좀 예민해서 딜이 잘 안 나오네’ 같은 소리를 했다. 본인들도 이상한 소리라고는 인지하고는 있는지 당사자가 있는 자리에서는 말 못하고 본인이 없는 자리에서 자기들끼리 쉽게 하고 넘어가는 농담이었다. 하드 컨텐츠에서 전원 전멸이라도 하는 경우엔 딱딱해진 분위기를 풀어주자며 ‘xx야 마이크 켜고 음성버프좀 해줘~’ 같은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다른 팀에 여자 멤버라도 있으면 자기들 옆에 여성 유저가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쟤는 분명히 자기 실력이 아닌데 (다른 남자들이 도와줘서) 저기에 있을 거다. 하는 얘기를 했다.

나의 성별을 지웠다

이런 불필요한 과정들이 피곤해진 나머지, 나는 온라인상에서 성별을 지우기 시작했다.

즉각적인 반응을 요구하는 게임들의 특성상 마이크로 음성소통을 하면 게임이 훨씬 편해지는데도 불구하고 마이크가 없다는 이유로 음성채팅을 안 하기 시작했고, 가입 시 신상정보를 공개해야 하는 길드 등은 가입하지 않았다. 그 시기 즈음 온라인 RPG의 유행이 사그라들고 AOS 장르의 시대가 왔다.

유저와 컴퓨터 간의 대결은 유저간의 대결로 넘어갔고 아는 사람끼리만 하던 음성채팅은 반강제적으로 낯선 사람들과도 대화의 장을 열어줬다. 이런 장르의 게임에서 여성 유저인게 추측되거나 아니면 음성 채팅을 켜고 공개적으로 말을 하기 시작하면 주목의 대상이 된다.

어떻게든 엮여 보려고 껄덕대거나
지면 여자 탓, 이기면 여자들 데리고 캐리한 내 탓을 하거나
목소리 듣기만 했는데도 온갖 성추행을 입에 올리거나

남성 유저들은 실제 얼굴을 보고는 못 할 경악스러운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주워 담아 입 밖으로 꺼낸다. 특히 <오버워치>가 심한 편인데, 인터넷상에서 검색을 조금만 해보면 여성 유저가 음성 채팅을 했을때 제대로 게임을 할 수 없다는 각종 사례가 동영상, 스크린 캡처 등으로 쏟아지고 있다.

‘오버워치 여성유저’라고 검색해 보면, 위의 동영상 외에도 많은 여성 유저들이 자신의 피해담을 녹화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하고 사실을 알리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런 피해 동영상의 댓글란에는 다른 여성 유저들이 자신이 당했던 오버워치 내 성차별 경험담을 공유하고, 때로는 대응하는 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굳이 그 공간에 남성 유저들이 찾아와 아래와 같은 댓글을 남긴다는 사실이다.

‘하여튼 게임하는 여자들 다 관종임’
‘여자면 얌전하게 게임이나 할 것이지 왜 목소리를 까서 분란을 일으켜’
‘그런 애는 또라이 맞음. 그렇게 더러운거 알면서 음성채팅을 한 여자 잘못 아님?’
‘남자도 잘못했는데 그걸 일일이 대응한 님이 더 잘못했네여;’
‘너 게임하는거 보면 욕먹을만한데? 여자라 그런거 ㄴㄴ뭐만 하면 여자라 그렇대 ㅉㅉ ’

국내 점유율 1위라는 소리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그 게임을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큰 PC방에 가보면 오버워치나 리그 오브 레전드를 하는 여성 플레이어들을 아주 손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존재감이 게임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뻔하다. 온라인에서 여성들은 게임을 할 때 자신의 존재를 지울 수록 마음 편하게 게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임은 하고 싶고, 음성은 써야겠는데 변조 프로그램이라도 써서 해야하나 하는 생각마저 들다가 왜 게임을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왜 쓰라고 있는 멀쩡한 시스템조차 여자는 제대로 쓸 수 없는지 생각하게 되는 순간 게임에 대한 흥미는 빠르게 식어갔다.

2017.03.30 16:31 발행

CREATOR

이 시리즈의 다른 기사

    저는 한국의 게이머입니다. 아, 여자고요. (上)
    FREE
    저는 한국의 게이머입니다. 아, 여자고요. (下)
    핀치클럽
    여성이 주인공이기에 가능한 서사, <Life is Strange>
    핀치클럽
    언제까지 게임에서 여자 가슴만 볼 건가
    핀치클럽
    '프린세스 메이커'는 정말 소녀를 공주로 만들 뿐일까
    핀치클럽
    RPG의 변화가 불편한 사람들
    핀치클럽
    드래곤 에이지: 전혀 사소하지 않은 여성 주인공의 이야기
    핀치클럽
    드래곤 에이지: 젠더를 넘어선 다양한 캐릭터
    핀치클럽
    여성의 이야기 전달하기: 관찰자가 되는 주인공
    핀치클럽
    나는 VR게임을 하는것이 두렵다
    핀치클럽
    게임 속 여성의 전쟁: 영웅담이 아닌 현실
    핀치클럽
    나는 네 영웅담의 악세사리가 아니야
    핀치클럽

Pinch Club에 함께하기

핀치의 모든 기사를 자유롭게 읽고,
스크랩할 수 있습니다

여성의 소식을 전하는 멤버 한정 메일링 서비스와
여성의 콘텐츠를 전하는 핀치굿즈를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크리에이터와의 대화, 세미나, 파티 등
핀치가 주최하는 다양한 온-오프라인 행사에
우선적으로 참여를 신청할 수 있습니다

You may also like

기사 더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