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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의 시대는 갔다

2016년은 걸그룹의 해였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소녀들이 플리츠 스커트를 입고 뛰어다닌 해 였다. 자신을 뽑아달라고 소리치는 프로듀스 101부터 시작해서 무릎이 깨지도록 춤을 추는 여자친구까지. 물론 이들은 분명 신비하기도, 혹은 씩씩하기도 한 서로 다른 소녀들이었지만 여전히 ‘주체적 어른이 되지 못하는’ ‘무해한 여성’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사실 별다를 것이 없었다.

사진 제공 = 연합뉴스

하지만 2017년은 여성 솔로의 해다. 어떤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한 것은 연말 가요제와 시상식에서부터였다. 2016년 12월 25일, SBS 연예대상에서 A.O.A의 설현과 트와이스의 정연은 드레스가 아닌 수트를 입고 레드카펫을 밟았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같은 방송사의 연말 가요제에서는 엄정화가 정규 10집 앨범의 컴백 무대를 가졌다.

사진 제공 = 키이스트

엄정화는 'Watch Me Move'를 부르면서 사실은 남자를 유혹하는 것 따위엔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처럼 노래하고 춤췄다. 붉은 글리터립을 바르고 '두 사람 중에 한 명은 나쁜 거라면 아마도 내가 아니겠니'하고 노래하는 'Dreamer'에서도 마찬가지 였다. 무대 위에서의 엄정화는 자기 자신이 되고 싶은 모습 그대로의 엄정화였다.

뿐만 아니다. 엄정화가 여성 솔로의 신호탄을 울리자마자 수지와 서현이 뒤이어 솔로 활동을 시작했고, 이효리 역시 2017년 상반기 귀환을 예고 했다. 한동안 뜸했던 여성 솔로의 연이은 등장은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 걸그룹의 홍수 속에서 어떤 변화의 시작을 알리는 것 같기도 하다.

사진 제공 = JYP, SM 엔터테인먼트

수지와 서현은 모두 2017년 1월 17일 음반을 발매했다. 공교롭게도 둘 다 이별 후의 감정을 노래한다. 그러나 그 방식은 분명히 다르다. 무표정한 얼굴의 수지는 사실 웃고 있는 자신의 모습은 ‘행복한 척’한 것이었다고 고백한다. 반면 서현은 ‘첨부터 다시 시작하면 안되니’라고 노래하면서도 뮤직비디오 속에서는 자신을 떠난 남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이들 이전에도 꾸준히 솔로 앨범을 발표하며 주목할만한 행보를 보인 여성 솔로 가수들이 있었다. 에일리는 힘 있는 목소리로 당당하게 ‘소름끼치니까 손대지 말라’고 노래했고, 아이유는 누가 자신을 뭐라고 판단하든 굴하지 않고 ‘어느 쪽이게?’ 맞춰보라고 외치기도 했다. 그리고 가인은 ‘피어나’, ‘Paradise Lost’ 같은 곡을 통해 여성을 적극적으로 욕망의 주체 자리에 세웠다.

사진 제공 = 로엔 엔터테인먼트

물론 그들의 행보를 전적으로 페미니즘으로만 해석하기엔 무리가 있다. 뮤직비디오에서 남자를 죽인다고, 그놈의 ‘나이’와 상관없이 꾸준히 자신만의 스타일로 신보를 낸다고 무조건 ‘페미니즘적 행보’로 칭송 받을 수는 없다. 수지는 2015년 발매한 화보집이 퇴폐 업소와 소아 성애를 연상시킨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며, 아이유 역시 ‘CHAT-SHIRE’ 앨범을 발표했을 당시 소아 성애 논란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여성에게 더 많은 서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제각각의 방식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서현 솔로 쇼케이스 V앱 캡쳐

서현은 솔로 쇼케이스에서 “이번 앨범을 제작할 때 목표가 여성분들의 마음을 대변해 여자가 사랑할 때 공감할 만한 내용을 담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여성 솔로가 우리에게 소중한 존재인 것은 그래서다. 솔로 앨범을 내는 순간 여성 가수는 비로소 수많은 걸그룹의 멤버가 그러했듯 ‘소녀’로 뭉뚱그려지는 일에서 벗어나게 된다. ‘수지’는 ‘수지’로, ‘서현’은 ‘서현’으로, 그리고 ‘엄정화’는 ‘엄정화’로 불릴 수 있다. 각기 다른 여성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플리츠 스커트와 대상화된 소녀의 시대는 이제 서서히 저물어 간다. 대신 무대에 등장한 것은 빨간색 글리터립을 바르고, ‘나를 얘기하는 말들이 무’섭다며 사실 행복한 척 하고 있었다고 털어놓는 여성들이다. 혹은 뮤직비디오에서 남자를 죽이기도 하는 여성들. 2017년은 그런 해가 될 것이다.

2017.02.09 18:28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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