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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신기 5대 팬픽, 팬픽과 문학의 경계

제 사랑에 잡혀 먹힐 정도로 나약하고,
사악함에 불쌍한 나의 아름다운 구원자.
당신으로 인해 다시금 피어날
나의 찬란한 생을 축복한다.

너는 내 가시마저 사랑해야 할
나의 아름다운 남자.

영화의 나레이션같기도, 지독한 로맨스 소설의 한 구절 같기도 한 이 문장의 출처는 <가시연>이다. 그 유명한 ‘8반 이쁜이’ 김재중을 탄생시킨 동방신기 팬픽, <가시연>말이다.

사실 팬픽은 ‘팬이 좋아하는 연예인을 등장인물로 활용하여 쓴 창작 소설’이라는 설명이 쓸데없이 길게 느껴질 정도로 우리에게 친숙한 단어가 되었다. 무한도전 작가가 방송 중간에 등장해 버젓이 자신이 쓴 ‘준하-명수’ 팬픽을 읽어주는 시대다. 

사진 제공 = mbc

그러나 팬픽은 여전히 음지의 문화다. 당당하게 자신이 팬픽을 창작하거나, 혹은 소비한다는 사실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는 그것이 단순 ‘팬 활동’의 일환이라는 점에서 그렇고, 또 팬픽이 연예인을 대상으로 쓴 야한 소설에 불과하다는 인식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후자의 경우에는 팬들도 할 말이 많다. 아이돌 팬픽의 황금기로 일컬어지는 동방신기 팬픽의 경우는 특히 그렇다. ‘팬픽도 문학이냐?’는 비아냥에 대한 팬들의 답은 ‘동방신기 팬픽을 한번이라도 읽어보고 말해라!’다.

팬픽의 황금기

왜 하필 동방신기의 팬픽 중에 '레전드'로 손꼽히는 작품이 많을까? 우선 팬덤의 크기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동방신기는 전성기 시절, 공식 팬카페 가입 회원수만 90만 명에 육박하는 아이돌이었다. 기본적으로 팬 수가 많으니 팬픽 역시 엄청난 양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 그만큼 소위 ‘금손’(높은 퀄리티의 창작물을 만들어내는 사람)의 수도 많을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사진 제공 = SM TOWN 

팬덤의 크기 뿐만 아니라, 타이밍도 참으로 시기적절했다. 동방신기는 2세대 아이돌의 신호탄이었다. (2세대 아이돌은 흔히 1세대 아이돌의 해체와 성적 부진 이후 약 2004년경 부터 데뷔하기 시작한 그룹을 의미한다. 해외 팬덤까지 겨냥했다는 점이 1세대 아이돌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아이돌 문화의 기틀을 잡았던 1세대 아이돌 이후, 팬덤 문화가 그 나름의 체계를 구축한 시기였던 것이다. 1세대에서 겨우 공, 수의 구분과 커플의 이름을 짓는 방법의 틀이 만들어졌다면, 2세대에 이르러서는 1세대 팬덤이 마련한 공식을 적용해 창작하는 작품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 수 있었다. 

게다가 2000년대 초반은 사실 팬픽뿐만 아니라 인터넷 소설 시장이 전체적으로 파이를 키워나가는 시기였다. 그 흐름을 타고 동방신기 팬픽 역시 자연스럽게 발전했다.

동방신기 5대 팬픽의 세계로

동방신기 5대 팬픽을 정확히 꼽을 수는 없다. ‘동방신기 5대 팬픽’이라는 표현은 존재하지만, 이를 언급하는 사람에 따라 그 목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작품들은 있다.

<가시연>, <마왕>, <21C 인어공주를 위하여>, <해피투게더>, 그리고 <박유천 비극사>가 그것이다. 이 외에도 <백색지연인>, <순수의 시대> 등이 있지만 우선은 앞의 다섯 작품만 살펴보며 팬픽 그 이상인 ‘동방신기 팬픽’의 세계를 엿보도록 하자.

<가시연> 
마요作

그저 정은호의 동생, 탕아 같기만 했던 열일곱의 정윤호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정은호의 뼛가루를 납골당에 안치시키던 날이었다.

「몇 반이냐.」
「8반...」
「너구나. 8반 이쁜이가.」
「응.」

<가시연>은 나머지 4개의 작품과 확연히 다른 성격을 가진 팬픽이다. 특히 (구) 동방신기의 다섯 멤버 중 단 두 명만을 등장시켰다는 점, 그리고 심지어 멤버의 다른 이성과의 섹스 장면이 그려진다는 점에서 그렇다. 

베드신의 자극적인 묘사, 이야기 전체에 흐르는 퇴폐적인 분위기를 특징으로 하는 <가시연>은 호불호가 명확히 갈리는 작품이다. 덕분에 동방신기 팬들 사이에서는 절대 첫 팬픽으로 추천해서는 안 되는 작품으로 꼽히기도 한다. (작가가 사실 도덕 선생님이라는 소문이 있다.)

줄거리

고등학교 시절, 재중은 두 학년 선배인 정은호를 짝사랑했다. 그에게 용기내어 고백을 한 날, 정은호는 교통사고를 당하고, 울다가 혼절한 재중의 앞에 나타난 것은 정은호의 동생, 정윤호였다. 자연스럽게 연인이 된 윤호와 재중이 헤어진 것은 그들의 사이를 반대하는 윤호의 어머니를 재중이 계단에서 밀어버린 이후다. 재중은 정신병원에 갇히고 2년의 세월이 흐른다. 그리고 2년 후, 이서희란 이름의 여자와 결혼을 한 윤호의 앞에 재중이 나타난다. 어찌해도 재중을 밀어낼 수 없던 윤호는 그를 결국 집에 들이게 되고, 셋의 위험한 동거가 시작된다.

감상포인트

고수위의 묘사나 자극적인 대사에 흠칫 놀라지 않도록 마음의 준비를 충분히 하고 읽자. 작가가 세세하게, 그리고 의도적으로 집어 넣은 표현들이 많으니 다른 어떤 작품보다 문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가장 의미 있다.

<마왕>
리즌作

“이젠 지겹도록 들었잖아? 자기야.”
“…….”
“익숙한 게 무서운 거라니까.”

5대 팬픽 중 스케일이 가장 크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대한민국에서만 모든 일이 벌어지는 다른 팬픽과 달리 글의 배경 자체가 홍콩과 마카오인 느와르물이다. 액션씬이 마치 영화처럼 화려하고 자세하다. 카드카운팅, 총격전 등이 실감나고 치밀하게 묘사돼 있다. 또한 이 작품은 글에 등장하는 장소, 차량, 총기류, 그리고 주류 등이 모두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영화 제의까지 들어왔으나 작가가 거절했다는 소문도 있다.

줄거리

열혈 인터폴 요원인 준수는 틈만 나면 상황 파악 못하고 총을 뽑아대다가 근신 처분이나 다름없는 프로젝트를 위임받는다. 사실상 인터폴이 손을 놓고 있는 프로젝트 ‘마왕을 찾아라.’ 마왕은 홍콩, 마카오 등지에서 급속도로 성장한 한국계 조직인 레피드로의 보스로 아무도 그 존재를 알지 못한다. 준수의 파트너인 프로파일러 창민 역시 어쩔 수 없이 마왕을 찾는 일에 엮이게 된다.

조직 레피드로에 대한 단서를 찾던 중, 준수는 한 술집인 메멘토 모리에 들르게 되고 주인인 믹키를 만난다. 마왕에 대해 묻는 준수에게 믹키는 자신이 마왕과 아주 가까운 사이라며 상대 조직이 풀어놓은 ‘가짜 마왕’을 제거하는 일에 동참하면 진짜 마왕을 찾는 일을 도와주겠다고 말한다. 준수는 믹키와 함께 가짜 마왕을 제거해나가면서 점점 마왕에 가까워진다.

감상포인트

마왕이 누구인지는 우리 모두가 안다. 마왕을 찾는 것 보다는 준수의 앞에서 무너지는 냉혹한 유천의 이야기에 집중하자. 이들이 가짜 마왕을 어떻게 제거해나가는지, 액션영화를 보는 느낌으로 따라가는 것도 좋다.

<21C 인어공주를 위하여>
매니쉬作

"내 영화가 망하는 일, 내 CF 몸값이 5억 아래로 떨어지는 일, 내 드라마가 시청률 30%를 넘기지 못하는 일, 그리고 방금 네가 한 말. 이것들의 공통점이 뭔 줄 알아?"
"......."
"불가능."


이제부터는 동방신기 팬픽계의 레전드 작가, 매니쉬의 작품이다. 매니쉬는 무려 5대 팬픽에 오른 다섯 작품 중 세 작품을 창작한 작가이며, 앞서 추가로 언급한 <백색지연인>, <순수의 시대> 역시 모두 매니쉬의 글이다. 함께 살펴볼 매니쉬의 세 작품 중에서 등장인물이 가장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 것이 바로 <21C 인어공주를 위하여>다. 폭력적인 내용과 극단적 전개 때문에 끝까지 읽지 못하고 작품을 내려놓은 팬들도 다수다.

줄거리

박유천은 호구다. 새벽에도, 학교에서 수업을 듣다가도, 알바를 하다가도, 정윤호의 전화가 걸려오면 언제든지 그에게로 튀어가는 호구. 그가 정윤호의 전화에 스프링 튀듯 재빨리 달려나가는 이유는 단순하다. 박유천은 정윤호를 사랑하니까. 정윤호가 옆집 형에서부터 승승장구하는 대한민국의 톱배우가 될 때까지, 그의 짝사랑은 멈추질 않았다. 그리고 그런 박유천은 정윤호에게 마치 공기처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매번 여자친구를 갈아치우면서도 유천과 관계를 가지고, 유천에게 자신을 평생 사랑하라고 말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 박유천의 학교에 김준수가 전학을 온다. 김준수는 데뷔를 앞둔 발라드 가수다. 준수는 유천에게 한 눈에 반하고, 그의 바보같은 짝사랑을 끝내주리라 마음을 먹는다. 정윤호의 세컨드 말고 김준수의 퍼스트로. 그러던 어느날, 술에 잔뜩 취한 윤호의 전화를 받고 나간 유천에게 끔찍한 일이 일어난다. 모든 것이 그때부터 꼬이기 시작한다. 사랑을 늦게 깨달은 남자, 사랑에 상처받은 남자, 그리고 사랑을 쟁취하고 싶은 남자의 이야기.

감상포인트

<가시연> 만큼은 아니지만, 이 글 역시 충분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읽는 것이 좋다. 각 등장인물들이 겪는 일들이 꽤나 잔인하고 비극적이다. 번외편이 다른 팬픽에 비해 자주 제공된다. 세 명의 주인공에게 모두 감정이입할 수 있는 장치이니, 돌아가면서 고통을 당해보자.

<해피투게더>
매니쉬作

"내가 왜 강한 줄 알아? "
"내가 알 바 없잖아! "
"강하지 못하면, 죽어. 알아? 내가 사는 세상은 그래. 손에 총이 없으면 머리로 총구가 들어오지. 상대방의 가슴팍을 다리로 짓누르지 않으면, 내 다리가 꺾이고 넘어져 버려. 먼저 죽이지 않으면 죽어. 난 그렇게 살았으니까 강한 거야. "
"으... 아프다고! "
"넌 내 세상 안으로 들어왔지만, 강할 필요는 없어. 내가 강하니까, 너는 강하지 않아도 돼. "

하이킥 3 <짧은 다리의 역습>이 표절했다는 의혹이 있던 팬픽이다. 몽유병 상태에서 살인을 목격하여 쫒기는 신세가 되었다는 상황 설정이 비슷하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그 외에 표절을 의심할만한 근거가 없어 흐지부지되었다. <마왕> 만큼은 아니지만 동네 전체를 사들인 조직이 등장하는 만큼, 스케일이 꽤 크다. 동방신기 팬픽 커플링의 정석인 윤재유수(윤호와 재중, 유천과 준수)의 이야기가 고른 분량으로 나온다.

줄거리

준수는 몇년간의 해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파티 플래너다. 그런데 한국에서 처음 주최한 파티가 범인을 잡는다고 온갖 난리를 피운 형사 박유천 때문에 망해버린다. 준수는 유천이 미친듯이 원망스럽지만 유천은 화를 내는 준수는 아랑곳 않고, 그의 미모에 반하고 만다. 준수가 심각한 수준의 몽유병이 있어 잠을 잘 때에 스스로 손을 묶는다는 사실을 밝혀도 유천은 여전히 그에게 애정공세를 멈추지 않는다.

한편 도박빚을 진 아버지 때문에 인생이 꼬여버린 김재중은 법대에 재학 중인 수재다. 몇 년 전에는 뉴욕에서 피아노 리사이틀도 하던 그였지만 이젠 사채업자를 피해 도망다녀야 하는 신세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빚을 대신 갚으라며 찾아온 이들에게 납치를 당하고 만다. 그곳에서 정윤호를 만난다. K카르텔의 보스인 윤호는 그의 정체를 숨기고 재중에게 접근한다.

이 넷이 엮이게 되는 것은 어느날 밤, 윤호의 살인 현장을 준수가 목격하면서다. 아니, 사실 준수는 몽유병 상태로 현장을 지나갔을 뿐이지만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윤호는 준수를 찾아내 죽이려 한다.

감상포인트

윤호와 재중, 그리고 유천과 준수가 서로 대립할 수 밖에 없는데, 두 커플 중 어느 쪽을 자신이 더 응원하고 있는지 문득 깨닫는 순간이 있다. 유수와 윤재 커플링의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참고로, 팬픽의 주인공인 윤재유수 커플이 아닌 심검사에 빠졌다는 반응도 의외로 많다.

<박유천 비극사>
매니쉬作

"유치해... "
"원래.. 유치한 게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거야, "
"그리고 나선 우리 세상에서 가장 유치한 사랑하자, 이럴려고 했지? "
"그래.. 우리 세상에서 가장 유치한 사랑하자, "
"이미 하고 있잖아, 바보야. "

아키(시아준수x믹키유천), 그리고 호민(유노윤호x최강창민)이라는 흔치 않은 조합의 팬픽이다. 특히 유노윤호와 최강창민 커플이 예상외로 아주 (심하게) 귀엽다. 박유천 비극사라는 제목이 무색하게 작품 초반의 분위기는 유쾌하다. 마치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를 가진 로맨틱 코미디물같다. 가난하지만 자존심은 있는 고딩과 막무가내인 재벌집 아들이 등장하기 때문. 그러나 정신없이 웃다가, 적응할 새도 없이 비극적인 전개에 휘말리게 되면 감정을 추스르는 것이 쉽지 않다.

줄거리

달동네에 사는 가난하지만 씩씩한 박유천과, 잘생겼지만 수다왕에다가 웃으면 빙구가 되는 정윤호는 거의 쓰러져가는 북진 고등학교에 다닌다. 그러던 어느날 학교 부지가 대기업 손에 넘어가버리고, 그들은 근방의 재벌 자제들이 다니는 신세고로 전학을 가게 된다.

한편 박유천은 길에서, 그리고 아르바이트를 하던 나이트에서 김준수를 자꾸만 마주친다. 준수는 대기업 신세그룹의 사생아로, 타고난 머리로 무엇이든 곧잘 하지만 세상에 아주 불만이 많은, 싸가지를 밥말아먹은 인간이다. 하루 일당의 스무배를 줄테니 같이 자자고 제안한 김준수에게 유천은 과일 안주를 몽땅 부어버리고는 머리에서 똥 치워줄 사람이나 찾으라고 소리친다. 그리고 준수는 유천에게 반한다.

그런 준수에게는 이복형, 신세그룹의 후계자 재중이 있다. 자신이 살던 집마저 재건축에 들어가 갈 데가 없어진 유천에게 재중은 자신의 집에 들어와 살라고 제안한다. 준수에게는 비밀로 한 채. 비극은 그때부터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감상포인트

2000년대 초반 인터넷 소설을 읽듯 생각 없이 웃고 싶다면 수학여행을 다녀온 직후에서 멈추거나, 호민커플의 에피소드만 골라내서 읽자. 중반 이후부터는 꽤나 우울하다. <21C 인어공주를 위하여>를 읽는 듯한 착각이 든다면, 매니쉬 특유의 분위기이니 이해하고 넘어가면 된다.

5대 팬픽의 특징들

우선 다섯 작품에 등장한 공과 수 캐릭터를 살펴보자. 팬픽에서의 공, 수는 주로 성관계시 삽입을 하는 쪽과, 삽입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생각하면 쉽지만, 모든 작품이 이러한 기준으로 공,수를 나누는 것은 아니다. 먼저 대쉬하는 쪽이 공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 역시 정확히 들어맞는 기준은 아니다. 

(최근 들어 모든 멤버를 상대로 공의 포지션을 유지하는 총공은 (멤버 이름 줄임말)+왼, 그 반대인 총수는 (멤버 이름 줄임말)+른 으로 불린다.)

그러나 분명, 그들 사이의 공통점은 있다.

폭력적인 공

5대 팬픽에서 ‘공’으로 등장하는 캐릭터는 총 9명이다. 그런데 이 중에서 ‘수’ 캐릭터에게 물리적, 성적 폭력을 행사하지 않은 인물은 <해피투게더>의 유천, <박유천 비극사>의 윤호 뿐이다. 흥미로운 것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인물과 그렇지 않은 캐릭터의 가장 큰 차이가 바로 사회적 권위라는 사실이다.

<해피투게더>에서의 유천은 매일 후줄근한 차림으로 근무를 서는 단순무식 강력계 형사다. 그가 좋아하는 준수는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파티 플래너다. <박유천 비극사>의 윤호는 다 쓰러져가는 달동네 고등학교의 재학생인 반면 그의 연하 연인인 창민은 상류층의 자제다. 

이와 달리 다른 공들의 직업은 재벌 2세, 거대 범죄조직의 보스, 그리고 탑클래스의 연예인이다. 즉 권력을 가진 공의 경우, 어김없이 수를 폭력적으로 다루는 인물로 등장하는 것이다. 이들은 또한 수를 사랑하고 있든 혹은 자신의 사랑을 깨닫지 못했든 간에 상관없이 강한 소유욕을 보인다.

<21C 인어공주를 위하여>의 정윤호가 특히 그렇다. 그는 자신을 향한 유천의 일방적인 사랑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탑배우인 정윤호는 매번 여자친구를 갈아치우면서도 유천과 관계를 가지고, 위로랍시고 한다는 말이 이런 거다. 

“걱정마. 세컨드 자리는 누구한테도 안 줄 테니까. 너 평생 가져.” 

그리고 그는 갑작스레 사랑의 라이벌 김준수가 등장하자,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물론 21C의 윤호 말고도 다른 공캐릭터들 역시 수를 때리거나, 감금하고, 혹은 성적인 폭력을 휘두른다.

그런 공을 사랑하는 수

그런 그들을 떠나지 않고, 혹은 떠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수’는 자신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그들을 사랑하기까지 한다. 수 캐릭터는 주로 처음부터 공을 사랑하고 있거나, 혹은 억지로 키스를 당하고 이후 급작스럽게 그들에게 빠져드는 것이 대부분이다. 

<해피투게더>의 재중은 심지어 정윤호의 조직에게 납치당하고, 뺨을 맞고, 성매매업소에 팔리면서도 그와의 키스 한번에 자꾸만 윤호를 떠올린다. 이러한 방식의 데이트 폭력 낭만화는 팬픽에서 일종의 클리셰처럼 자리잡는다.

또 하나 흥미로운 공통점이 있다면, 대부분의 수 캐릭터는 공 캐릭터와의 스킨십 이전에, 여성과의 성경험이 전무하거나 키스조차도 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자신을 명확하게 ‘게이’로 인식하고 있는 가시연의 재중과 해피투게더의 준수를 제외하면 딱히 그럴 이유가 없는 인물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21C>의 유천, <마왕>의 준수 모두 공과의 키스가 인생의 첫 번째 키스다. <21C>의 유천이야, 공인 윤호가 어렸을 때부터 항상 붙어 지낸 옆집 형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마왕>의 준수는 20대 초중반의 ‘자신을 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남성이다. 무성애자였던 것도 아니다.

남자를 사랑하지만 게이는 아니다

이는 팬픽 속에서 그들이 스스로를 ‘동성애자’로 인식하는가의 여부와도 관련이 있다. 사실 동성팬픽의 주인공들은 명확히 자신들을 ‘게이’로 지칭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공, 수와 관계없이 그렇다. ‘남자’라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하게 된 사람’이 하필 남자였을 뿐이라는 식이다. 혹은 이전까지는 게이가 아니었지만 ‘남자인 누군가’에게 반하면서 게이가 되었다는 서술도 가능하다. 동방신기 5대 팬픽에서도 역시 이러한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나는 딱히 게이는 아니었지만, 남자를 보고 가슴이 두근거렸던 적은 처음이었다.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엎드려 자고 있는 그 녀석은, 남자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하얀 피부에 예쁜 얼굴을 하고 있었다.
<21C 인어공주를 위하여>
" 내가 키스했을 때 어땠어? "
" 혓바닥 뽑아버리고 싶었어. "
" 왜, 너무 좋아서? "
" ... 너, 게이냐? "
" 너한테는. "
<해피투게더>
김준수는 27년동안 정상인으로 살아왔던 자신까지 단번에 게이로 바꿔 놓을 만큼 매력이 출중한 녀석이다. 저렇게 잘 차려입은 모습을 보고 누구든 반하지 않을 리가 없잖아...! 팔불출 다운 생각으로 징징거리느라 바쁘다. 
<해피투게더>

성소수자에 대한 부족한 이해는 공, 수 캐릭터의 외형 묘사로까지 이어진다. 공은 대부분 ‘날렵한 콧대, 건장한 어깨, 근육질의 몸’을 가지고 있다. 키도 수보다 크기 때문에 수는 항상 공을 올려다 본다. 이와 달리 수는 주로 ‘하얀 피부, 붉은 입술, 얇은 허리’와 같은 표현으로 묘사된다. ‘수’인 준수가 몸에 근육이 잡힌 인터폴 요원으로 나오는 <마왕>의 경우가 예외인 정도다.

야설과 문학,
그리고 호모포빅 그 사이 어딘가

그럼 이쯤에서 다시. 동방신기 5대 팬픽은 ‘문학’이 아닌가? 아니라면 ‘야설’에 불과한가? ‘문학인 것’과 ‘문학이 아닌 것’의 경계는 언제까지나 애매모호할 것이다. 때문에 감히 ‘잘 쓴 팬픽은 문학’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을 테다. 

하지만 단지 멤버들이 등장하는 '야설’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였다면, 백만 자가 넘는 분량의 글을 써내려 가고, 영화를 찾아가며 액션씬을 만들어내고, 한두 달도 아닌 근 일 년을 꾸준히 연재할 필요까지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붙은 시도 시인데, 무턱대고 팬픽은 문학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억울하다.

그러나 그것이 문학인가, 문학이 아닌가를 따지는 것보다 먼저 논해야 할 것은 그 속에 녹아 있는 성소수자 차별과 혐오의 그림자다.

아이돌 동성 팬픽이 성소수자를, 그리고 실존 인물을 소재로 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위험할 수 있다는 지적은 타당하다. 실제로 동성 팬픽은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 차 있으며, 성소수자의 성애를 포르노적으로 소비한다는 점에서 문제의 소지가 있다. 아이돌을 대상으로 한 RPS(실존하는 인물 간에 로맨틱한 관계를 설정한 2차 창작 콘텐츠로 대부분 동성 연애 관계를 그린다)가 고민해야 할 지점이 여기에도 고스란히 녹아 있는 셈이다. 

동방신기 이후 수많은 아이돌이 데뷔했지만 아직도 동성 팬픽은 호모포빅하거나, 성소수자에 대한 부족한 이해를 토대로 한 경우가 많다. 공, 수로 연애 관계를 나누어 구분하는 안일함도, 성범죄의 낭만화도, 차별적인 성역할 묘사도 여전하다. 팬픽이 얼마나 문학적으로 발전하였는지와는 별개의 문제다.

아이돌은 영원하다고? 아이돌이 영원하다면 팬픽도 영원하다. 그래서 우리가 기획사가 전략적으로 사용하는 아이돌 그룹의 '브로맨스'를 본격적으로 비판하고 논의하지 않는 이상 팬픽은 문학과 야설, 그리고 호모포빅 그 사이를 영원히 떠돌 것이다. 누가 인정하든 말든, 비난하든 말든.

약 10개월 동안 연재해 온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봐주신 분들께 무한한 감사를.

가슴 아픈 과거를 가짐으로써 감정적으로, 육체적으로 글 안에서 혹사 당해야 했던 유천오빠에게 감사와 사랑을.
그런 남자를 끌어 안아주느라 역시 글 안에서 힘들어해야 했던 준수오빠에게도 감사와 사랑을 보냅니다.

거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사랑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한 남자의 삶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글을 써 보고 싶었습니다. 글의 제목조차도 '마왕' 이었으니까요. 
사랑하는 연인의 앞에서 모든 가면을 벗어 버리는 순간, 언제나 완벽하던 마술을 서툴기 짝이 없는 손짓으로 하고 마는. 무섭고 완벽해 보이지만 사랑스럽고 연약한 남자의 이야기를요.

(중략)

모두 죽어라 사랑하고 행복하기를. 결국 마왕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그게 전부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상처를 감싸 안아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행운을 얻기를. 반드시 행복해지기를.

멤버들과 유수와 팬분들의 행복을 빕니다. 행복해지세요. 감사합니다. 

- 5대 팬픽 중 하나인 ‘마왕’의 작가 리즌이 연재를 끝내며 덧붙인 글

2017.01.17 16:13 발행

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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