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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질하는 여자

이민

여성의 싸움

왜일까. 자라면서 여성을 위한 싸움 팁 같은 것은 들어본 적이 없다. 중학생 시절, 한번은 다른 반의 여학생과 소위 ‘맞짱’이라는 것을 붙어야 했던 적이 있는데 그 때 싸움으로 소문이 자자한 남학생에게 조언이랍시고 들은 말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너흰 여자니까 머리채를 먼저 잡고 놔주지 말아라’ ‘살이 얇은 부위를 꼬집어라.’ 내가 상상한 건 주먹을 어떤 식으로 쥐어라, 어느 부위를 쳐라 같은 것이었는데 말이다.

그뿐인가. 정의로운 곳에만 ‘주먹’을 쓰는 은둔 싸움 고수 남학생의 이야기는 들어봤어도 그런 여학생이 있다는 소문은 들어본 적이 없다. 대신 누가 ‘걸레’라더라, 혹은 누가 그 무서운 오빠 여친이라더라 하는 이야기만이 떠돌아다닐 뿐이었다. 영화도, 만화책도 그렇다. 언제부턴가 남성들의 인생 영화가 된 <바람>이나 <크로우즈 제로> 같은 것은 있어도 여성이 제대로 주먹질 하며 싸우는 영화는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여성에게는 싸움의 ‘전설’ 같은 것이 전해질 일이 없었다. 한국 여성들에게는 남성들이 낄낄대며 거리낌없이 외모 비하의 대상으로 삼는 ‘힘이 센 여자’, 혹은 전문 운동선수이지만 아는 형님 따위의 예능에 나와 제대로 주먹을 쥘 줄도 모르는 남자들과 복싱 대결 따위를 해야 하는 ‘예쁜 여자’가 있을 뿐이다.

싸움의 전설

3월 7일 방송된 비디오스타 ‘싸움의 전설’편에는 연예계에서 한 싸움 한다고 소문난 이른바 여성 연예인 4명이 모였다. 태보를 한 조혜련, 권투를 배운 춘자, 왕년에 싸움과 관련한 수많은 소문을 몰고 다녔던 그룹 디바의 리더 비키, 그리고 펀치기계 고득점자인 베리굿의 태하.

비디오스타는 이들에게 수많은 ‘주먹질’에 대한 루머를 파헤쳐 보겠다며 해명이 필요하면 하라고 경고했지만 사실 그들에 대한 소문은 전혀 ‘부인’하거나 ‘해명’할 만 한 일이 아니다. 그들이 한 일은 방송작가에게 예의없이 구는 남자 후배를 민망하지 않게 따로 불러내어 한 소리 한다거나, 같은 학교 후배를 괴롭히는 다른 학교 학생들과 싸움을 한다거나, 혹은 강간범을 쫒아가 잡는 정도의 일들 뿐이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비키는 자신들이 무대를 할 때 과일 등을 던져대던 손님을 직접 불러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런 짓을 하느냐’고 따져 묻기도 했다. 한창 현역 가수로 활동하던 때였다. 이것이 특히 인상 깊은 이유는 같은 자리에 있던 여성 패널들이 모두 비슷한 고충을 겪었지만, 모두 그 상황에서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했다고 털어 놓았기 때문이다. 많은 연예인들이 행사장, 나이트 클럽 등 무대에서 관객의 무례함을 감내한다. 여성이라면 더하다. 그런 관객에게 직접 항의하고 사과까지 받아내는 비키의 모습은 ‘싸움꾼’보다는 오히려 기죽지 않고 할 말 하는 멋진 여성에 가까웠다. 현재 비슷한 고충을 겪고 있을 전효성이 특히 더 ‘멋있다’고 칭찬하는 모습이 나만 인상깊었던 것은 아닐테다.

왜 우리는 그동안 미디어에서 이처럼 강인하고 제 할말 다 하는 여성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지 못 했나? 힘이 센 여성을 매력이 없는 사람으로 묘사하거나, 혹은 그들에게도 알고보니 ‘반전 여성미’가 있었던 것으로 덮어씌우는 수작은 계속되어 왔다. 특히 비디오 스타에 출연한 조혜련은 ‘힘이 센 여자’의 대표 캐릭터가 되어 온갖 명절 특집 씨름 프로그램 등에 불려다녔다. 물론 열심히 일한 그에게 돌아온 것은 ‘멋지다’는 평 대신 ‘무섭다’는 반응이었다. 또 다른 ‘힘 센 여자 연예인’의 대표격인 이영자는 다양한 프로그램에서 괴력을 발휘하는 모습이 ‘놀라운 구경거리’ 정도로 연출되거나, 몸집이 작고 마른 남성들을 이긴 후 ‘여성도 못 이기는’ 남성 캐릭터를 부각할 때에 이용되어야만 했다.

그 뿐인가. 한 때 씨름 등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소녀 장사’로도 불렸던 윤은혜는 ‘여성스럽고 섹시한’ 모습으로 이미지 변신을 하며 강인함을 감추어야만 했다. 이처럼 여성의 신체적 강인함이 미디어의 놀림거리가 되면서, 여성은 자연스럽게 싸움에 대한 가능성을 잃게 되거나 혹은 그 능력을 숨기게 된다. 진짜로 싸우는 여성은 어디에 있나? 머리채를 잡고 뺨을 때리고, 말싸움을 하거나 꼬집는 것 대신 정말로 주먹을 쓰는 여성들 말이다. 비디오스타의 춘자처럼, 남성 셋 정도는 가볍게 제압하는 바로 그런 여성들.

신체적 강인함을 자랑하는 여성

프로그램 말미에 여성 출연자와 패널들이 모여 펀치 기계에서 누가 더 높은 점수를 내는지 내기하는 모습, 누가 더 강인한가를 겨루며 즐거워 하는 모습은 분명 여성들이 학창시절, 혹은 지금도 친구 무리와 한 두번쯤은 경험해 봤을 일이다. (베리굿 태화의 일화처럼 여성이 높은 점수를 받으면 괜히 한번 나서서 펀치 기계를 쳐 대는 남성이 등장하는 모습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그런데도 왜 두려움 없이 불의에 주먹을 날리는 여성의 이야기는 없는지, 누군가의 공격에 힘을 이용하여 맞받아 치는 여성의 이야기는 미디어에 왜 없는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기싸움이나 캣파이트로 감히 정의내리지 못하는, 남성들이 자신들만의 것이라고 착각하곤 하는 바로 그것. ‘정의로운 주먹’이나 올바른 곳에 사용되는 ‘신체적 강인함에 대한 동경’, 그것도 아니면 단순히 힘을 과시함으로써 얻는 즐거움 같은 것들 말이다. 어쩌면 그 ‘순수’한 힘에 대한 동경과 과시에 대한 즐거움은 이미 여성이 대상화되는 동시에 일찍이 잃어버리게 된 것 일지도 모른다.

여성은 신체적 강인함을 얘기할 때 언제나 한발짝 물러나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비디오 스타에서 비키가 ‘여성과 아이들이 피해 당하는 것을 보고 지나치지 못’ 한다고 직접 이야기 했을 때, ‘몸매 관리 비법’을 물어보는 질문에 춘자가 곧바로 ‘날씬함을 유지하는 방법’ 따위가 아닌, ‘DJ 활동을 더욱 에너지 넘치게 하기 위한 방법’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정의로운 곳에만 주먹을 쓰는 여성, 신체적 강인함을 자랑스러워 하는 여성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비디오스타 ‘싸움의 전설’편은 분명 의미가 있었다. 비록 ‘걸크러쉬’와 ‘반전 여성미’ 같은 단어 없이는 출연자들을 수식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힘이 센 여성을 대단히 특별한 구경거리나 가십거리로 사용하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2017.03.28 12:05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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